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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면 무수리 도랑운포구는 무수리에 거주하던 선주들이 중선을 정박했던 포구다. 선주들은 무수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전주 이씨 집안 사람들로 이웅렬, 이봉렬, 이재인이었다. 이들의 후손인 이재극 씨와 함께 도랑운포구에 대한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당무교에서 직선거리로 700m 가량 떨어진 곳에 도랑운포구가 있었다. 이곳에는 중선배 3척이 정박했는데, 이들은 아산만 등지에서 조업활동을 했으며, 정월이면 뱃고사를 지냈다. 1960년대 이후 이재인 씨를 마지막으로 세 명의 선주들이 어업을 중단하면서 자연스레 도랑운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1.06.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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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면 당산리에 있던 옛 면천군의 북창인 송리북창은 성구미포구, 오섬포구 등과 함께 송산면의 주요 포구였다. 가야산에서 발원하는 역천이 면 경계를 따라 북류해 남양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의 안쪽, 깊은 내륙 쪽에 북창포구가 존재했다. 옛 송리북창은 현재 송산면 당산1리 이상하 씨 가옥의 뒷밭이 창고터, 즉 북창터이고, 뒤쪽에 인접해서 작은 언덕 너머에 살고 있는 이석면 씨가 살고 있는 집터 앞에 있는 갯고랑이 뱃터다. 송리북창이라 불리었던 지점은 이후 지역주민들에게 굼벙골로 불리며, 송산 내륙지역의 주요 포구 역할을 해왔다. 196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1.05.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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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섬포구에 대해 구술자들이 말한 내용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1950년대의 이야기다. 올해 94세인 고간난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옛 기억이 또렷했다.순성면 갈산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스무 살에 오도리로 시집와 74년째 살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만 해도 오섬은 집이 10채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발생한 피난민들이 1960년대 초 옹진군 덕적도 등지에서 배를 타고 오섬으로 대거 이주해오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처음에 왔을 때는 집이 8~9채 정도 됐고 6.25전쟁이 지나고 나서 피난민들이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1.03.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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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의 아름다운 포구, 성구미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성구미 앞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건져 올리던 어민과, 유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포장마차의 정 많던 상인들은 모두 성구미를 떠났다. 그러나 고향 마을을 잃어버린 주민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름답던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송산면의 최북단 곶에 위치한 성구미포구는 예부터 남양만에 연하여 다양한 어종이 나고 고깃배들이 정박하기 좋았던 송산의 대표 포구였다.“이 동네 한 번 따져 볼텨? 우리 1반은 도랑운과 허기고개여. 허기져서 허기고개라고 했어. 운말, 양지말, 음지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0.12.1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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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섬마을에 개발 소식이 날아든 건 1990년대 후반 무렵이다. 행담포구 주민들에게 서해안고속도로 개발로 서해대교가 섬을 관통하게 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았다.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주민들 대다수는 행담도에 소유한 땅 한 평 없이 당진군에서 지어준 새마을주택에 거주하거나 무허가 건축물에서 살았기 때문에 보상에서도 자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주민들의 생계 이주대책 요구에 한국도로공사 측은 가옥이 무허가이거나 주민 소유가 아니며, 영업허가가 없는 무허가 업소라는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0.10.3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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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면 북쪽 아산만에는 간조시 드넓은 펄이 드러난다. 펄마다 주민들이 부르는 고유지명이 있다. 영흥펄, 진강펄, 등대펄, 새펄, 상대펄 등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펄 이름이다. 이외에 멍애펄, 지펄 등도 언급됐다. 아마도 위 펄들의 별칭으로 보인다.영흥펄은 서해대교 주위로 평택시 만호리 앞바다에 드러나는 모래펄로 1985년경 바지락 양식장이 조성됐다. 진강펄은 맷돌포 앞바다에 있던 펄로 간조시 수십만 평의 펄이 드러나는데 이곳 역시 1980년대 바지락 양식장이 있었다.등대펄은 행담도와 복운리 사이 등대 부근의 펄을 가리킨다.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0.05.2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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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부터 어업생활을 한 박상진(매산1리) 씨도 처음 탄 배가 황포돛배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에는 선원 셋이서 노를 저어 썰물 때 송산을 거쳐 국화도 앞까지 갔다가, 밀물 때 다시 맷돌포구로 돌아오며 고기를 잡았다. 준치·삼치 등이 주 어종이었단다. 어망은 그물을 고정시켜 잡는 낭장망을 사용했다. 박 씨는 낭장망이 6.25전쟁 때 피난 와서 정착한 황해도 사람들 덕에 시작됐다고 말했다.“그물을 고정시켜 놓은 그물이 있었어. 낭장이라고. 옛날에 그게 왜 있었냐면 이쪽 사람들은 모르는데 피난 나온 황해도·함경도 사람들이 북에서부터 그
농업·농촌
당진시대
2020.02.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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