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읍성 복원사업은 지역의 오랜 숙원 사업 중 하나다.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쉽게 잊혀져버린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는 것이 읍성 복원사업의 중요한 목표지만, 이를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지역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활로로 기대되고 있다. 이번 기획을 통해 면천읍성 복원사업의 현재와 추진과제를 진단하고, 타 지역의 읍성 복원 사례를 통해 관광자원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당진은 예부터 서산·태안과 함께 중국과 교역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던 지역이다. 국가적 통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동시에 국방에도 중
“옛날에는 당진군이 아니라 봉천군이었지. 그때 당시 관아가 면천에 있었는데 한진하 옹이 돈을 많이 빌려줬었나봐. 그러고 대신 받은 것이 이 집이라지.”(박상진 씨)당시 한진하 옹(1880~1946)의 땅을 밟지 않고는 마을 어디를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지역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우강면 원치리 모정마을에 위치한 이 가옥은 故 한갑동 시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현재는 그의 맏아들인 한명우 선문대 교수가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다. 집 관리는 박상진 씨 부부가 맡았다. 한갑동 가옥은 1993년 12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3
삼국시대 초기 백제 축조 “역사적 가치 충분”성상리 산성은 면천면 성상리와 삼웅리의 경계지점인 해발 119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 내부의 경사면을 깍아낸 산정식의 테뫼식 산성이다.테뫼식 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곽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 바퀴를 둘러 쌓은 산성으로 단시간의 전투에 활용하기 위한 산성이다.삼국사기에 따르면 테뫼식 산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성을 쌓기 시작한 삼국시대 초기로 짐작되며, 백제가 테뫼식 산성을 가장 활발히 축조했을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실제로 백제의 산성은 테
면천면의 영탑사와 함께 당진지역의 역사적 사찰로 고대면의 영랑사를 빼놓을 수 없다. 영랑사 역시 창건시기와 창건자가 불확실한 고찰 중 한 곳이다. 누가, 언제, 왜 지었는지도 여러 가지 추측만이 있을 뿐 정확히 내려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영랑사의 역사 대웅전과 범종 영랑사 대웅전은 밖에서 보면 단순하고 중후한 느낌을주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한번 수리하며 그 모습을 갖췄으나 이후 몽고의 침입 등 나라의 환란으로 그 모습을 잃어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다시
청렴한 관료 이의무 선생송산면 도문리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의무 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왕이나 2품 이상의 고관들의 업적을 기록한 비로 보통 무덤의 동남쪽에 세워진다. 이의무 신도비는 그의 아들 이행 공이 좌의정을 지내며 아버지를 추증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다.이의무 선생은 관직에 있는 30여년 동안 재물을 모아본적 없이 살았을 정도의 청백리의 상징이다. 또한 그의 셋째 아들 이행 공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음에도 사치가 없어 부자 대대로 선비의 표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덕수 이씨 연헌공파 문중이 당진에 자리잡은 시기는
천년 역사 자랑하는 합덕제연호방죽 혹은 합덕방죽으로 불리던 합덕제의 명칭이 바뀐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합덕에 살고 있는 많은 주민들은 합덕제를 연호방죽이나 합덕방죽이라 부르고 있다.합덕제는 후삼국 시절 후백제의 왕 견훤이 합덕 지역에 9000명의 병사와 6000필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둔전을 개간해 만든 저수지라고 한다. 둑이 쌓여진 시기가 고려 이전이라는 설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유력한 설이라 할 수 있다.합덕제는 제방길이 1771m, 둘레 9000m이며 저수면적은 103만㎡에 관개면적은 726ha나 되는 거대
읍성이란 지역민을 보호하고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과 함께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던 공간이다. 그렇기에 읍성은 그 지역에 대한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읍성은 지형이 험준하면서도 입지가 넓고 평평한 곳 중 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땅이 비옥한 지역에 축성된 경우가 많았다.읍성의 본격적인 축조시기는 고려 말엽부터라 알려져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까지 이어진 왜구의 칩입에 심각한 피해가 생겼던 시기로 읍성의 역할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것과 동시에 왜구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천주교는 임진왜란 때 학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1784년 경에 종교로써 자리했다. 천주교가 종교로 자리 잡아 오기까지 온갖 박해와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특히 조선 말엽에 일어난 4대 박해(신유박해, 병오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는 천주교 신자 1만 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당진시에는 대표적인 세 곳의 순례 성지가 있다. 합덕에 자리한 합덕성당과 신리성지 그리고 우강면에 자리한 솔뫼성지이다.합덕에 위치한 신리성지는 충남도 기념물 176호로 지정돼 있는 성지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로 알려져 있
영탑사 내에 있는 문화재들에 비해 영탑사는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다. 현재는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영탑사는 당진 내에서도 영랑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그만큼 보존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영탑사 법당 내에 자리한 불상이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상이 있고, 그 좌우로 협시불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세 불상은 얼굴이 네모지며 볼에 살이 많고 가늘게 내려 뜬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이 특징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 불상들의 특징을 알
정미면에 위치한 안국사지에는 배바위라 불리는 매향암각과 석조여래삼존입상, 그리고 석탑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후기에 세워졌다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 자세한 기록도, 유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고려 후기 이민족의 잦은 침략으로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매향암각은 형태가 배모양과 같아 배바위라고 불리기도 하고 고래모양과 닮아 고래바위로도 불린다. 자연석의 통바위인 매향암각은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를 자랑하는 거대한 바위다.매향이란 내세의 복을 빌거나 마을에 화가 닥쳤
현재 면천초등학교 내에 자리한 면천 은행나무는 무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 뒤에는 술을 빚기 위해 물을 길었던 안샘이 있으며, 안샘의 물을 길어 만든 면천 두견주는 대표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려를 세운 개국공신 중 한명인 복지겸 장군은 병을 얻어 고향인 면천 땅에 낙향해 있었다. 그의 딸 영랑이 아버지의 병수발을 도왔으나 차도가 없어 아버지의 쾌차를 빌고자 아미산(현 면천면 소재)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렸다.백일 째 되던 날 영랑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아비의 병을 낫게 하고 싶으면 아미산에 만개한 두견화(진달래꽃)의 꽃잎
기지시 줄다리기는 당진 지역 내의 큰 보물이자 축제다. 지난 15일에는 당진을 넘어 파주 임진각에서 평화통일 기지시 줄다리기 행사가 개최됐다. 특히 기지시 줄다리기는 내년 유네스코 지정을 앞두고 세계적인 문화유산로 거듭나고 있다.기지시 줄다리기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은 길이 200m, 직경 1m, 무게 40t에 달한다. 그만큼 만드는 제작과정도 어렵다. 몸줄과 잔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잔줄에는 새끼줄 210가닥이 쓰인다. 몸줄은 새끼줄 70가닥씩을 엮어 만든 중간줄 3가닥을 줄틀이라는 도구
송악읍 신암사(주지 석일훈)에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보물 제987호 금동불좌상이 있다.신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 능성 구씨의 4대손인 구예가 가교리에 터를 잡으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신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금동불좌상은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이 청양의 장곡사 불상의 모습과도 가깝지만 좀 더 당당하고 볼륨이 있는 형태다.특히 얼굴은 무게감 있는 모습으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체는 장대하며 느슨하게 표현된 가슴근육은 장곡사 불상과 같은 양식이다. 하체는 넓고 당당한 모습이며 특히 무릎의 근육 묘사는 상체의 표현과 조
당진향교당진향교는 읍내동 남산기슭에 남향으로 있다. 이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학교조에 ‘현에서 동쪽으로 3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진향교는 조선시대의 향교로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1407년(조선 태조 7년) 유현(儒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된 이 향교는 여러 차례 중수된 바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제기고(祭器庫) 등 이다.대성
안섬풍어당굿은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굿의 한 형태이다. 문헌상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약 4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송악면 안섬은 원래 당진군의 북서쪽에 있는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된 곳이다. 이곳의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나가기 전에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며 당제를 지냈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첫번째 진일(辰日-병진일(丙辰日)제외)에 당굿을 올리는데 격년제로 대제(大祭)와 소제(小祭)를 나누어 지낸다.소제는 당제(堂祭)의 형태로, 대제 때에는 무당이 참여하는 당굿 형태로 진행된다. 안섬 당제의 구조
유실된 면천읍성, 원형 복원사업 한창관아, 객사도 복원해 옛 저잣거리 구현할 것[편집자주]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80년 넘도록 신자 맞이하는 합덕성당벽돌과 목조로 된 고딕 양식, 2개의 종탑이 특징[편집자주]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수상은 ‘국태민안’ 수하는 ‘시화연풍’최대 오천 명 줄 당기는 대형 민속놀이[편집자주]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
탑 세우고 영험하다 하여 ‘영탑사’불태워진 가야산 흔적 고스란히 남아●편집자주 /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
능성 구씨가문의 원찰, 매년 시제때 자손 700여명 모여당당하고 격의 없는 미소 띤 보물 아미타불상 [편집자주]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