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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송악읍에는 섬이 존재하지 않지만, 남양만과 아산만에 접해 있고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여 여러 개의 섬이 존재하였다. 특히 바닷물이 송악읍의 고대리, 월곡리, 정곡리를 지나 석포리까지 드나들면서 내륙에 형성된 내포(內浦)가 발달하였다. 송악 지역에 존재했던 섬으로는 안섬, 구지섬, 딴섬, 대섬 등이 있었으며 이 중 면적이 가장 넓고 규모가 큰 섬이 안섬이었다. 송악면지에 따르면 “안섬은 송악면 내에서 한진과 함께 어업이 발달한 곳으로 현재도 어업의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안섬은 원래 송악면 유일의 유인도로 1.2㎢ 면적에 53
사회
당진시대
2023.05.05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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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행 정기선과 함께 한진포구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은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를 연결했던 나룻배였다. 만호리행 나룻배는 해방 전 1939년 한진리 마을에서 공동 수익사업으로 지역민들의 건의에 따라 소위 ‘수산조합’이라는 명칭의 단체를 구성하여 최초로 운행되었다. 이후 경영상의 문제 등으로 개인에게 운영권이 이관되어 여러 차례 선주가 바뀌었고, 1980년경 운영이 중단되었다. 만호리행 나룻배는 경기·서울 등지로 가는 당진사람들과 당진을 방문하는 평택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학생·군인 등 일반여객 외에도 각종 화물을 동반한 상인들의 이용
뉴스
임아연 편집부국장
2023.04.0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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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서북쪽 끝 행담도와 서해대교가 마주보이는 아산만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한진포구는 당진을 대표하는 포구다. 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신평현에 있고 북쪽으로 114리에 있다”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서 언급한 대진이 바로 한진을 일컫는다. 큰 나루라는 뜻의 ‘한진’ 역사는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대진에는 백제시대부터 창고와 관아가 있어 당나라를 오가는 상인과 사신이 대진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쓰여 있다. 현재는 아산만 해안가의 잇따른 간척과 산업단지 조성 사업 등으로 이전의
당진지역기획
당진시대
2023.03.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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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순성면 중방리 북창포구까지 바닷물이 드나들고 배가 들어왔다. 이곳에 홍주북창이 있어서 현물조세미를 보관하였고 이것을 실어 나르던 배가 들어왔다. 순성면 중방리 가운데, 남원천변의 옛 신남면 창리 지역이 현재의 북창마을이다. 북창마을은 ‘홍주북창’이라고도 부르는데, 1895년 고종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홍주군 관할의 신남면을 면천군에 편입시키고, 다시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면천군이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옛날 홍주군 관할의 신남면 창리 지역이, 면천군 관할이 되고, 다시 당진군(현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
뉴스
당진시대
2023.02.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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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면 부장리에 위치한 남원포구는 강문리의 사발포(부리포)와 더불어 1970년대까지 우강에서 가장 번화한 포구였다.인천행 여객선의 기착지였으며, 남원포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부장리농협이 설립되면서 부장리는 물론, 인근 마을의 벼를 수매하고 도정해 남원포구에서 곧장 인천으로 판매했다. 남원포구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정육점, 이발소, 약방, 자전거포, 오토바이 대리점, 술집과 음식점이 영업했다. 남원포구에는 주로 인천행 여객선과 쌀 등을 실어 나르는 화물선이 출입했다. 하지만 어선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
기획
당진시대
2022.04.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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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개나루 인근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쌀로 운임을 지불했다. 이용하는 빈도에 따라 운임을 달리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근 마을 주민 중에는 도고장이나 선장장으로 채소나 생선 등을 팔러 다니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반주민들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을 운임으로 지불했다. 독개나루는 삽교천변의 주요한 해상교통 중심지였다. 이러한 나룻배 운영과 운임제도는 1920년대 이전부터 최소 50~60년간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늠케 하는 옛 신문기사를 소개한다. ‘독포진 선가개정과 부근주민의 원성’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부제 ‘
읍면소식
당진시대
2022.03.0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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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개나루는 합덕읍 신흥리와 우강면 내경리에서 아산시 선장면 궁평리 모새절로 가는 나루다.독개나루는 삽교천 연변에 사는 합덕과 우강의 들 사람들이 식수가 나빠서 독개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삽교천을 건너가 선장에서 식수를 구해 오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당진, 서산, 면천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독개나루-선장-공세곶-평택-서울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삽교천이 막힌 뒤로도 한동안 아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된 독개나루는 현재 자취를 찾기 어렵다.내경리 주민들은 흔히 선장장, 도고장, 온양장을 이용했다. 장보러 아산에 가려면 주로 독개나루를
뉴스
당진시대
2022.02.2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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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지에는 살매기를 하는 이들이 물 때를 기다리기 위해 만든 임시초소인 ‘살막’도 있었다. 해변가에 움막 형태로 지은 살막은 저마다 살 맨 곳이 잘 내다보이는 곳에 지었다. 살을 맨 사람들은 참봉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떡이며 음식을 가져다 놓고 제를 지냈다. “고깔식으로 참봉을 만들어 놓고 떡을 해서 고기 잘 들어오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빌었어요. 갯섭, 복희, 삼봉여가 모두 따로따로 자기 것을 만들어서 참봉을 모시는 거지. 고사 지내듯 떡 해다 놓고 술 따르고 그랬지. 우리집 주변에 소나무밭이 있는데 그 속에도 하나가 있었고, 자기
기획
당진시대
2021.07.1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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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지에서는 살 말고도 조립식 휴대어망으로 고기를 잡는 사둘질도 이뤄졌다. 물이 쓰면 낙지도 많이 잡혔다.“시루지 앞바다에 뻘이 길게 빠지면 낙지가 무지하게 잡았어요. 거기 가면 암만 못 잡아도 50~60마리, 많이 잡으면 150마리씩 잡았다고. ‘양은바께스’에 하나 가득 잡아 오면 어머니가 당진에 나가서 파셨어요.”김명환 씨가 한창 낙지잡이를 했던 1970년대 시루지에서는 20여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낙지를 잡았다. 삼각모양의 조립식 휴대어망인 사루질도 시루지에서 이뤄졌다. 사람이 그물을 들고 다녀도 고기가 잡힐 만큼 어족자원이
뉴스
당진시대
2021.07.1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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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포가 사라진 건 1960년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지역주민들의 구술에 의하면 1960년대 서원천 하류에 제방이 막히면서 바닷물의 흐름이 끊겼다. 주민들은 이 제방을 ‘신흥개발 방조제’라 불렀다. 농지개발의 일환으로 시행된 이 사업은 신흥개발이란 회사에서 진행했으며 대표인 이승철 씨를 기리는 선정비가 남아 있다. “신흥개발 방조제가 막히고 나서도 정리가 금방 된 게 아니라 1970년도 초까지 한창 경지정리한다고 했었으니, 그때까지 (바닷)물이 들었지. 방조제를 막기 시작한 사람이 이승철이라고 서울사람인데
뉴스
당진시대
2021.05.1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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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포구는 송산면 명산리에 1960년 중반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작은 포구다. 주민들의 구술에 의하면 현재 송산방조제에서 2km 가량 떨어진 상류에 일명 신흥개발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바닷길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인근 주민들은 명산리의 서원포구를 이야기할 때, 외나무다리식당을 먼저 떠올린다. 몇 해 전까지 식당으로 운영된 이 집은 명산리에 바닷물이 들어올 당시 새우젓을 보관했던 곳이었다. 명산리 마을회관에서 외나무다리식당으로 향하다 보면 서원천 위에 송악읍 정곡리로 연결된 교량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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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5.0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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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 때면 오섬포구 앞 갯고랑에도 펄이 드러났다. 오섬 앞 펄에는 특히 맛조개가 많이 났다. 오섬 주민들은 ‘써개라’는 맛 잡는 도구로 맛을 캤다. 더러는 펄에 커다란 둥지처럼 땅을 파고 들어앉아 맛을 잡기도 했단다. 그러다 물 들어오는 때를 놓치면 허겁지겁 구덩이를 빠져 나오느라 식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처음에는 조금만 파서 내버리고 내가 들어 앉어. 그럼 송송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게 맛이지.” (고간난)그렇게 잡은 맛은 주로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 애호박이 날 때쯤 함께 넣어 볶아먹으면 그 맛이 참 좋았다. 밤이면 횃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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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4.1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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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리 은골과 쌍천동 송산면 동곡리에 남은 옛 지명 중 ‘은포’라 불리는 포구를 기억하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현재 송산방조제를 막은 지점에 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안평일 씨의 집은 앞마당에서 낚시대를 던지면 바다에 닿을 만큼 바다와 가까웠단다.“지금 송산방조제에 위치한 휴게소 바로 옆이 옛날 우리집터인데, 집에 앉아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망둥이 잡느라고 낚시질을 했어. 거길 은골이라 불렀어. 그 근처에서 어업했던 사람은 나 하나였고. 집 앞까지 물이 들어오니까 포구는 아니었어도 배를 대놨었지.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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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4.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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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항구의 흔적 대부분이 사라진 오섬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 있다. 옛 나루터 부근에 자리한 낡은 창고가 그것이다. 이 창고는 일제 강점기 때 오섬항을 통해 공출되었던 쌀을 보관했던 창고로 알려졌다.오도리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은 “옛날에 그 창고가 벼를 공출했던 자리인데 송산면 뿐만 아니라 당진군에서 생산된 벼들이 거기로 모였다”며 “이후에 그게 없어지고 소금창고로 쓰이다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고간난 할머니는 소금창고로 쓰이기 전, 창고에서 일어난 일을 꺼내 놓았다.“회(會)를 한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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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3.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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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섬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다. 당시 오섬은 당진에서 인천으로 가는 정기여객선을 타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60세 이상의 당진 출신 주민들 중에는 오섬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타고 서울을 드나들었다던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오섬에는 여관이나 음식점, 상점 등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도시의 신문물도 오섬포구를 통해 당진으로 들어왔다.“그때는 미니스커트 입고 당진을 들어오는 관문이 오섬이었어요. 아이들이 놀다가도 배 들어온다고 하면 쭉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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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3.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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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전부터 당진은 해상교통이 발달했다. 포구의 기능도 주로 세곡 운반에 비중을 두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포구들은 점차 쇠퇴해 이제는 옛 지명이나 문헌을 통해 당시의 명성을 가늠할 뿐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주민들에게 당진의 관문이자 대표 항구로 기억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오섬이다.송산면 오섬은 일제 강점기에 인천기선회사가 선박을 독점해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인천으로 수출되는 곡물이 1년에 수십만 석에 달했으며 상당수의 승객이 매일 왕래하던 곳이었다. 인천행 증기선은 1960년대 말까지도 명맥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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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대
2021.02.23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