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석문면 출신으로 당진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내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무용을 권유해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춤을 출 때마다 재능을 찾아준 아버지가 보고 싶어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능을 찾아준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전통무용을 하면서 무속인으로 보는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을 받아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잘 버텨냈다. 지금은 한국무용지도자협회 당진시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문화원에서 매주 월요일 한국무용반을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2013년 4월 해오름 국립극장
사진을 찾아보며 나한테 이런 때가 있었나 싶은 사진들을 발견해 추억에 잠겼다. 어느새 커버린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아쉽기도 했다. 나는 가곡1리 마을 부녀회장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부녀회장 활동을 해왔다. 그덕에 새마을여인상, 새마을훈장 협동장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20년이라는 시간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아마 남편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결혼 전 처녀시절에 찍은 사
“사진은 찍는 게 남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남아있는 건 결국 사진이고 이것들로 추억을 되새긴다. 2008년 당시 민종기 군수에게 교로1리에서 유일하게 표창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진을 찾지 못해 아쉽다. 꽃다발과 상을 받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때 그 감동이 느껴진다. 앞으로도 추억이 될 많은 사진을 남기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1971년 3월 첫째 딸이 시집갈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 출신으로 16살에 3살 연상인
어떤 사진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앨범 하나를 통째로 가져와 버렸다. 다른 이들이 보면 그냥 지나가는 사진 한 장이겠지만 나에게는 한 장 한 장이 소중한 추억들이다. 오랜만에 옛날 사진을 살펴보니 ‘이 시기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첫 번째 사진은 안양고등학교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당진에서 다녔는데 고등학교는 경기도 안양으로 진학했다. 가운데 교련복을 입고 있는 것이 나다. 지금은 제식훈련이 사라졌지만 내가 고등학생일 때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좋지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 대신 형들이 설탕물을 타먹이며 나를 키웠고, 학비 때문에 학교도 어렵게 다녀야 했다. 그 옛날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가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다보면 늘 당당하게 사는 내모습을 존경한다는 친구녀석도 있다. 고생한 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 현재에 만족한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14살 때 유곡초등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뒤에 어렴풋이 나온 건물이 초등학교인데 현재는 화단으로 바뀌었
나는 신평초등학교, 신평중학교, 신평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모두 당진에 스며있다. 늘 내 생활에는 미술이 함께했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그린섬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을 보다 보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모든 것들이 추억의 한 조각이 돼있음을 발견했다. 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난날에 후회는 없다. 첫 번째 사진은 신평중학교 3학년 3반 친구들과 찍은 단체사진이다. 나는 제일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있다. 중학생 때부터 미술부에 들어가 그림을 취미로 시작했다. 그때는 미술을
앨범을 펼치니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라 즐거웠다. 추억을 되새기며 사진을 고르다보니 20장 넘게 고르고 말았다. 총각이었던게 엊그제 같은데 가정을 꾸리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안산에서 사업을 하다 고향을 잊지 못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다. 현재는 충청남도 검도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고향인 한진포구에서 선창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974년 8월 26일에 찍은 사진으로 어민, 수협직원들과 함께 속리산 문장대로 단합여행을 갔을 때다. 당시 나는 당진군청 수산계 지도선단에서 일했다. 바위 위에서
사진을 고르면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옛날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지나갔던 순간 하나하나 다시 한 번 되돌아 보니 모두 소중한 추억이다. 예전 사진을 찾아보면서 내가 행복하게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첫 번째 사진들은 88년도에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과 22년 후에 같은 곳에서 다시 찍은 사진이다. 신혼여행 시절 묵었던 호
면천에서 태어나 면천초등학교, 면천중학교, 합덕농업고등학교를 거쳐온 나는 면천 토박이다. 사진을 찾아보면서 농협에 입사해 20년 동안 겪었던 지난 세월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면천농협에 입사해 강원도 춘천의 농협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내 번호였던 129는 아직도 나에게 의미있는 숫자로 남아있다. 이 때 나는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연수원 평가결과에서 90점을 넘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당시 90점을 넘은 신입은 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웅변을 시작으로 시낭송의 길로 빠져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빨리 찾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시간에 시를 읽은 후 자리에 앉았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칭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지도 모르겠다.학창시절 나는 합창부, 합주단, 전교부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를 당차고 야무진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옛날에는 인상이 매섭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인지 인상이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라남도 여수에서 쭉 살아오다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2009년에 당진으로 이사를 왔다. 낯선 타지인지라 처음에는 두려움도 컸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은 이곳에 정을 붙여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 보험설계사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왼쪽)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와 찍은 사진이다. 여수에는 3개의 여고가 있었는데 나는 중앙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 때 교복자율화가 추진되고 있던 시기여서 1학년 때만 교복을 입었다. 그래서 이 사진은 교복을 입고 찍은 몇 안되는 소중한 사진이다. 그때는
첫 번째 사진들은 돌 때 사진과 누나(신화식)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나는 고대면에서 태어나 1970년도에 고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육상부를 했는데 4명의 선수 중 첫 번째 주자로 활동했다. 이때 고산초 육상부는 충남을 재패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호서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육상부 활동을 했는데 중학교 2학년때 육상부가 해체되면서 육상을 그만뒀다. 두 번째 사진은 4-H회 당진연합회장을 지내며 찍은 사진이다. 4-H회에서 최연소 회장을 맡은 나는 충청남도연합회장을 거쳐 최연소 농어민 후계자 선발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당진전통시장에서 50년 동안 조개나 굴 등의 해산물을 팔아 왔다. 옛날에 단골손님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통 보이지 않는다.어시장을 재건축 한다고 상인들이 자리를 옮기면서 시장 분위기도 많이 좋지 않다.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오래도록 장사를 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오래전 시댁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이 남편(임낙중)이다. 이때도 시장에서 조개와 바지락을 팔고 있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부터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착하게 잘 커줘서 고마운 마음뿐이다. 두 번째 사진은 88서울올림픽 때 모습이다. 당
5살 때부터 당진에 살았다. 잠깐 직장 때문에 20여 년 정도를 타지에서 보낸 뒤 돌아온 당진은 무척 달라져 있어 격세지감을 느꼈다. 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겼는데, 장소는 사라지고 추억만 남아있는 것이 안타깝다.첫 번째 사진은 당시 목사리 우리마을의 길목이다. 한 손에는 개구리 잡는 대나무 총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개구리를 한아름 잡아 집으로 걸어
첫 번째 사진은 1987년 소년가장세대와 양어머니 결연 당시 찍은 사진이다.어머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온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동들과 양어머니가 결연을 맺는 뜻 깊은 행사였다.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전해 아이들이 보다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을 전했던 기억이다.두 번째 사진은 (당시) 당진읍 청룡리 이장을 할 때 찍은 사진이
국화가 좋아 퇴직 이후부터 줄곧 국화를 키워 왔다. 사람들이 하나씩 선물로 달라기도 하고, 팔라기도 하던 국화를 좀 더 많이 키워 고향인 합덕지역의 학생들을 위해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퇴직교사들로 이뤄진 국향회를 조직했다. 평소 국화 키우는 방법 등을 주고받던 퇴직 교사들이 선뜻 참여했다.2008년부터 1년간 정성들여 키워 낸 국화를 판매해 마련한 수익금
마을 이장 일을 봐온지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마을주민들이 마을의 대소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어려운 일에 처한 주민들이 있을 때는 함께 의견을 모아 힘을 보태기도 했다.나 하나 살기에도 벅찬 요즘 같은 세상에 공공의 일에 앞장서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사는 마을이며 평생을 함께해온 주민들의 일이기에 부단히 노력해왔다.
오랜만에 사진첩을 열어보니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곱게 단장한 내 모습이 보인다. 금산이 고향인 나는 예산출신 남편(김상호)을 만나 1989년에 결혼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지만 벌써 24년이 흘렀다. 남편을 만나 아이도 낳고 지역에서 봉사활동도 하다보니 금방 시간이 흐른 듯하다.남편과의 여행 도중 찍은 사진들도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곳
첫 번째 사진은 중학교 1학년 학예 발표회 시간에 찍은 사진이다. 내 예술적인 재능을 알아본 영어 선생님이 무용과 시화전 참가를 권유해 고전무용을 했던 기억이다. 선배들 틈에서 시화전을 준비하며 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발표회를 마치고 교내 연못에서 명상에 잠기며 시심을 키웠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두 번째 사진은 대학생 시절, 100
일부러 감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꽁꽁 숨겨 있던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이런저런 사진들을 뒤적이는 동안 두 딸들이 달려와 “엄마 뭐해?”라고 묻는다.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속 추억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뒤돌아 본 과거는 딸들과 내게 행복한 시간을 하나 더 남겨 줬다.첫 번째 사진은 정미초등학교에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