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드르륵’ 정겨운 재봉틀 소리에 맞춰 안세진 작가의 손이 움직이자 에코백 하나가 뚝딱 만들어진다. 재봉틀과 원단이 있다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작은 파우치부터 시작해 가방은 물론 앞치마와 배냇저고리까지 모두 가능하다. 그가 운영하는 심플소잉NCC 충남당진점에는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소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심플소잉NCC의 ‘소잉(sewing) DIY’는 재봉틀로 옷과 소품 등을 직접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그의 직업은 재봉틀로 다양한 소품을 만드는 작가다. 하지만 원래 꿈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존경하는 한 소녀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품고, 16년 째 한 길만을 달려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클래식의 본고장 독일로 날아간 그는 오늘도 꿈을 위해 활을 잡는다. 엄마의 끼를 물려받다독일 바이마르국립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정세화 씨가 방학을 맞이해 오랜만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 당진을 찾았다. 세화 씨의 엄마 이병숙 씨 역시 바이올리니스트로 읍내동에서 ‘이병숙 스즈키 바이올린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엄마의 얼굴은 물론 재능까지도 쏙 빼닮은 세화 씨는 7세 때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뒤 1
여든의 나이에 시집을 냈다.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삶의 풍파를 겪으며 한 줄, 두 줄씩 써내려간 글들이 어느 덧 책 한 권의 분량이 됐다. 그렇게 끄적거려온 글은 삶의 기록이 됐다.재생타이어 개발해 사업 성공유윤근 옹은 젊은 시절 인천에서 꽤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군대에서 배운 자동차 정비기술과 더불어 인연의 끈이 이어져 폐타이어를 재활용해 타이어 재생외피를 개발했다. 외국산 뿐이었던 당시 시장에서 국산 재생타이어는 처음이었다. 새 타이어보다 더 오래 쓰는 재생 타이어는 마모가 잘 되지 않아 경비 절감에 도움이 돼 전
찢어진 청바지를 좋아하던 최상근 작가는 어느 날 찢어진 청바지 틈 사이로 비치는 속살을 보면서 ‘천’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그 후 천을 재료로 하는 회화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2015년 아미미술관 레지던시 작가 전시를 통해 천으로 작업한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는 그가, 오는 13일부터 6일 간 12점의 작품을 서울에서 처음 선보인다.디자인, 조소, 수채화까지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에 흥미를 느껴 관심을 가졌지만, 미술교육을 받을 수 없어 미술대회에 출전하더라도 상 한 번 못 탔다. 이후 고등학생 1학년 때부터
가수 배호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어린 소년은 40년을 돌고 돌아 지금 꿈 앞에 섰다. , , 를 타이틀곡으로 하는 첫 앨범을 낸 임도나(본명 임흥순, 합덕읍 대합덕리 출신) 씨가 고향에서 다시 노래를 부른다.“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이었어요. 가수 배호의 , 등을 잘 불렀죠.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특히 트로트를 좋아했어요. 트로트를 부를 때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요.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당시에는 가수를 ‘딴따라’라고 불렀을 때니까요.
당진지역의 초·중·고등학교 여름방학이 모두 끝났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31일 간의 방학을 보내고 학생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방학은 잠시 학업에서 한 발 떨어져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학기 중 부족했던 학업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배우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혹은 봉사와 취미, 여행을 즐기며 방학을 보낸 친구들도 있다. 당진중학교 2학년 이혜린·강은정·이소영·인효림 학생처럼 말이다. 이들을 만나 그들의 여름방학 이야기를 들어보았다.혜린이의 방학혜린(父 이범주·母
고대면 당진포리에서 태어난 이웅한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처음엔 축구를 하려 했다. 고산초를 재학 중이던 그는 축구부가 있는 서산 해미초를 가고 싶어 했으나 우연히 유곡초를 거쳐 합덕초로 전학가게 됐다.합덕초에 야구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선생님에게 “야구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곧바로 야구부 감독이 그를 찾아왔고, 그때부터 야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기에 형편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故 이종서)와 어머니(김종은)는 일을 하기 위해 경기도로 떠났고 둘째 누나(이민선)와 자취 생활
지난 6일 강가애 골키퍼가 소속된 구미스포츠토토가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을 거뒀다.구미스포츠토토는 합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천현대제철과의 제16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일반부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4-3으로 승리했다.두 팀은 전반전이 끝날때까지 2-2로 팽팽한 경기를 진행했으며, 이후 후반전과 연장 전후반까지 추가골이 나오지 않아, 승부차기까지 경기가 이어졌다. 국가대표 골키퍼들의 대결이었다. 승부차기에서 인천현대제철 골키퍼 김정미 선수가 먼저 킥을 막아냈지만 기세에 눌리지 않고 구미 스포츠토토의 강가애 선수는 인천
낮에는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한의사가 이따금씩 일탈을 벌인다. 청바지를 입고 컴컴한 무대 위에 올라,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락밴드 보컬로 변신하는 것이다. 마치 ‘지킬 박사’처럼 신성철 원장은 두 얼굴을 가졌다.경희신성철한의원을 운영하는 신 원장은 스스로 “자제가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장난기가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꽤 독특한 삶을 살았다.카이스트 입학한 공학도읍내동 출신으로 당진초와 당진중, 호서고를 졸업한 신 원장은 본래 한의대가 아닌 한국
지난 10일 SBS 생활의 달인에 로 독일빵집이 소개된 이후 연일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방영 직후 번호표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독일빵집을 찾는 손님들이 각지에서 모이고 있다.프랜차이즈 강세로 인해 골목을 지키던 개인 빵집은 하나 둘 사라지고 지금은 찾기가 힘들 정도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빵집 심중섭 대표는 40여 년 간 한 길만을 묵묵히 걸어왔다. 또한 자신만의 비결을 고민했고 결국,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일빵집만의 빵을 만들어 냈다. 심 대표는 “돈 버는 이득을 생각하기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당진시지회(이하 당진시지회) 신임지회장으로 천강환 씨가 자리했다. 천 지회장은 지난달 12일부터 새롭게 임기를 시작해 앞으로 4년 간 당진시지회를 이끌어갈 예정이다.△6.25참전유공자회 △월남참전유공자회 △고엽제전우회 △상이군경회 등 여러 보훈단체가 있지만 무공수훈자회는 전쟁에 참가에 공을 세워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다. 당진에는 현재 100여 명의 무공수훈자가 있으나 점점 연로해지면서 그 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천강환 지회장은 1967년 6월부터 3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운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에 골인고아라 씨는 대학 시절 남편 박영재 씨를 만났다. 선배의 소개로 만난 박 씨는 군인이었다. 훈훈했던 외모의 박 씨가 마음에 들었던 그는 제대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서 박 씨가 전역했고,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해 두 아이를 낳기까지 단 4년만에 모든일이 이뤄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에서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그 무렵 첫째 아이 보름이가 생겼다. 두 사람 모두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해 두 달 뒤 결혼식을 올렸다.시댁살이 1년, 처가살이 1년결혼한 뒤 1년은 서울 시댁에서 살았다. 행복할
“아동지킴이 활동비를 학교에 기탁하고 싶은데….”매일 아침 상록초등학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아동지킴이 신현철 씨가 행정실을 찾았다. 아동지킴이 활동비로 38만8000원이 입금됐다며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물었다. 그렇게 3월이 지나고 4월, 5월에도 어김없이 행정실을 찾았다. 그는 “처음에 간식을 살지, 쌀을 사서 전할지 많이 고민했다”며 “다행히 행정실장님의 도움으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잘 쓰였다고 하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했다.“나도 봉사하고 싶은데”상록초등학교 앞 동암하이테크를 운
15만 원 때문에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당진에 온 첫 날, 부부가 하루 일 해 번 돈이 15만 원이었다. 북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15만 원이 이곳에서는 하루 만에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비록 힘들지언정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 서러움과 함께 희망이 차올랐다. 천웅지 씨는 “15만 원이 이 땅에 대한 인식을 바뀌게 해 줬다”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노력하면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 싶은 배짱이 생겼다”고 말했다.“감자라도 배불리 먹고 살았다면”채운동 천웅지·예소은 부부는 열심히 살
“6.25 전쟁이 터지면서 살기 위해 정신없이 남한으로 내려왔어. 옆 동네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길가에는 잘린 팔다리가 나뒹굴었지. 정말로 끔찍했어. 10명의 식구들이 모두 살아서 연평도로 피난 온 것은 기적이야.” 고달팠던 난민살이순성면 봉소리에 살고 있는 오재환 씨는 1922년생으로 94세의 고령 노인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10명의 식구와 함께 연평도로 내려왔다. 고향과 집을 잃은 그는 남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야말로 ‘찬밥신세’였다. 아니 찬밥마저도 고마울 정도로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어느날 그의
오래되고 낡은 것에서도 느껴지는 특유의 멋스러움이 있다. 정미면 산성리에 살고 있는 오세천 씨는 버려진 목재와 기와에 그림을 그려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작품을 탄생시킨다. 5년 전부터 폐목·기와에 그림 그려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가 버려진 목재와 기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부터다. 바다에 버려진 목재들이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띄었고, 그는 폐목을 주워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 씨가 주워온 폐목들로 집안이 가득찰 정도다. 특히 오 씨가 염전에서 주워온 폐목에는 아직
남편의 사고와 죽음…눈물로 얼룩진 나날들자궁암 이형증 “살고 싶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었을 무렵,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어도 곳곳에서 애정을 담은 편지가 하루 3통 씩 오곤 했다. 뜯지도 않은 편지들은 곧장 아궁이로 들어가 땔감이 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우연히 뜯어 본 편지에서 진심이 느껴졌다.그렇게 펜팔을 주고받기 시작해 결혼까지 이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날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난의 시작이었고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죽지 못해 지난 날들을 살았다”며 “그래도 지금까
학비를 벌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고, 2원50전의 차비를 아끼려고 먼 길을 걸어 다녔던 까까머리 소년이 어느덧 정보통신 엔지니어링업계의 대부가 됐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딛고 일어서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고향과 가족들의 그 따뜻한 품이 삶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한국 지식기반산업 주도문헌일 재경당진시향우회장은 정보통신 엔지니어링 업계 중 IT/ICT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기업 문엔지니어링을 운영하고 있다. 문엔지니어링은 정보통신 및 정보시스템 컨설팅과 설계, 감리
어릴 적부터 소심한 성격 탓에 남 앞에 나서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눈빛부터, 목소리부터 다르다. 문화예술창작소 내숭의 문영미 대표는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수줍은 문영미로 돌아온다.“초등학교 2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가수 주현미 씨를 보고 반해, 연극배우를 꿈꾸게 됐어요. 아버지가 주현미 씨의 팬이였는데 당시 주현미 씨가 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연극배우를 꿈꿨죠. 가수를 보고 왜 연극배우를 꿈 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제
지난해 7월 새롭게 부임한 방상천 당진소방서장은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조선대학교와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1993년 간부후보생 7기를 지냈으며, 나주소방서 화순119안전센터장과 충청소방학교 교관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천안서북소방서장을 거쳐 현재 당진의 소방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일반적으로 소방서는 화재피해를 복구하고 수습한다는 인식이 대다수다. 하지만 화재피해를 수습하는 업무는 10%에 불과하다. 동물을 구조하는 등의 현장서비스, 인명구조 및 구급 업무가 주요 업무다. 무엇보다 화재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