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마저 희미해져 버린 흑백사진은 중학교를 다니던 16살 때다. 이때쯤 부여에 있는 낙화암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바퀴가 큰 트럭 적재함에 타고 간 기억이 난다. 앞줄 맨 왼쪽이 박상배 선생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본인. 왼쪽 아래 사진은 아들(최종관, 27) 돌 때 아내(이임선, 62)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돼 있지만 지금도 환하게
어렸을 때는 높은 곳이면 어디든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첫번째 사진은 중학교 1학년때 경남 양산에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 이렇게 멋진 나무를 두고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었다. 25살, 나무보다는 좀 더 높은 곳을 찾아 날아오르고 싶었다. 마침 패러글라이딩 교관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 시간이 나면 가끔씩 하늘을 나는 자유를 만끽하곤 했다. 오른쪽 사진은
코흘리게 철부지 중학생시절 동네형들에게 이끌려 다니던 때부터 4-H회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가난한 영세농의 큰아들로 태어나 대농장주를 꿈꾸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농고에 진학하면서 영농학생회 활동과 각종 경진대회에 참가하였고, 농업전문대학 진학 후 대학4-H연구회 활동, 농업기술센터에 취직하여 17년 근무기간중 4-H회업무를 본소에서만 10여년 담당하였
4살 때던가, 제대로 기억이 남아있을리 없겠지만 이 사진을 보며 혼자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저렇게 어렸을 때도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어 꽃다발을 선물받았을까? 아니면 사진 찍는데 소품으로 어른들이 억지로 손에 쥐어준 것일까?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내가 동네 여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살인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멋지게 폼을 잡고 서 있는 명실공히 꽃을 든 남
첫번째 사진은 내가 여섯 살 나던 해, 세살박이 동생(김진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세발자전거는 어린 나에게 최고의 교통수단이자 장난감이었다. 두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1학년때 육상부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손기정 선수와 같은 훌륭한 마라토너가 꿈이었던 나는 광천고등학교에서 피나는 훈련을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의 마라톤 선수인 이봉주도 이 때는 나와 같
내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첫번째 사진은 아내(김영의)와 함께 찍은 약혼기념사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다소곳이 앉아 있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신나게 놀다가도 사진기만 들이대면 아이건 어른이건 갓 입대한 이등병이 되어 버렸다. 두 번째 사진은, 25년 전 속초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찍은 사진이다. 그
첫번째 사진은 칼라사진이 처음 나올 쯤 찍은 사진이다. 남들보다 유독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때부터 사진의 길에 들어섰다. 고등학교 취업반 시절 사진현상 기술을 배울 때 대전역에서 찍은 사진이다. 두번째 사진은 속리산 법주사에서 찍은 사진. 제대 후 사진을 찍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다. 세번째 사진은 무주 구천동 정상쯤에서 잠시 쉴 때 찍은 사진이
빛바랜 사진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벌써 20여 년 전으로 훌쩍 넘어가 있다. 한참 혈기왕성했던 그 때에는 세상에 못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첫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때 친구(왼쪽, 이철수, 한국토목측량설계사무소장, 45)와 함께 태권도 발차기로 한껏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었다.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태권도를 해 온 나는 지금도 태권도유
이장으로 일하던 1986년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제주도 감귤농장 견학을 갔었다. 탐스럽게 익은 감귤을 배경으로 우리 일행이 찍은 사진이지만 가운데 동상은 당시 우리 일행이 아니었음을 밝혀둔다(맨 오른쪽이 이민철, 유병규, 손인부, 장광순, 윤기천, 본인).고대면 이홍수·선옥자 부부
내 사진첩은 대부분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했었던 모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중에서 위의 사진은 유근한 농림부장관으로부터 1986년에 복합영농과학분야 ‘새농민상’을 수상할 당시 찍은 사진이다. 이 때 아내(한삼희)도 같이 참석했다. 왼쪽 사진은 고대면 반 계원들끼리 제주도에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20년 전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마을의 이장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설레었던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첫번째 사진은 온양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것이다. 집안친척들의 중매로 만나게 된 남편(김종갑)은 지금까지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으로 항상 곁에 서 있다. ‘국화빵 같다’라는 말은 우리 모녀를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나를 쏙 빼닮은 작은 딸(김성희) 초등학교 졸업식때 다정하게 얼굴 맞대고 사진을
첫번째 사진은 다섯살 때 사진. 나는 고대초등학교 4학년인 큰누나를 따라 자주 학교에 갔었다. 아침에 함께 등교해 누나 책상 밑에 조용히 숨어있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도 먹고... 그러다가 선생님한테 몇번 걸려 혼도 나고... 그래도 그때는 왜그리 학교가 좋았는지... 선생님한테 들통나 혼날 때마다 부모님이 집에 안계시기 때문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데리고
촌스러움의 극치, 79년도. 이 당시에는 머리며 옷이며, 어쩌면 그렇게 촌스러운지. 하지만 그때로 보면 적어도 남들한테는 지지 않는 패션이었던 것 같다. 집안의 귀염둥이었던 나는 큰언니와는 19살 차이, 막내언니와는 7살 차이였다. 이 정도되면 얼마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큰 형부가 나를 딸 같이 여겨 가끔 내려올 때마다 너무 예뻐한
내 나이 24세, 새파랗게 젊은 놈이 ‘예전엔 그랬었지’하고 말한다면 건방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도 10년전, 20년전에 겪었던 소중한 추억들이 있다. 첫번째 사진은 내 생일잔치에 누나 둘, 동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얼굴은 카메라를 보고 있지만 사진 찍는 일보다 바로 코 앞에 차려놓은 음식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다. 두번째 사진은
지금이야 아들 딸 구별 않고 한 둘 낳으면 그만이지만 예전에는 자식이 많을 수록 다복한 가정이라고 했다. 아들 넷, 딸 넷. 팔남매를 키우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모두들 훌륭하게 자라 주었다.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나가 살고 있어 두 식구 뿐이지만 명절 때가 되면 집은 식구들로 넘쳐난다. 첫번째 사진은 시동생의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이때쯤의 사진 찍는
나이가 들어서도 또렷이 기억 날 좋은 추억들 4살 때쯤, 서울에 사는 외삼촌댁 앞에서 막내이모와 외사촌(장호순, 오른쪽) 사진을 찍었다. 골동품처럼 보이는 승용차도 그때는 흔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코흘리개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만큼 기억이 희미해질 쯤, 삽교천에서 있었던 노래자랑에 나갔다. 93년도에 결혼을 하고 아들이 15개월 되던 때
한창 젊었을 적 우리 동네는 선·후배들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 첫번째 사진은 동네 선배인 김광일(50)씨와 함께 한진포구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두번째 사진 역시 마을 선·후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모두들 한 짐씩 짊어지고 지리산에 올라서 한껏 폼을 잡아봤다. 세번째 사진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날에 찍은 사진이다. 아내(임순례, 46)와 나
"결혼에서 회갑까지"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요즘들어 새삼 실감이 난다. 아래 두 사진은 우리 부부가 결혼을 하고 첫 딸(오미경)을 낳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30여년이 훌쩍 넘어버린 세월 동안 사진은 빛이 바래고 낡아졌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안고 있던 어린 딸이 눈깜짝할 사이에 커버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왼쪽 위의 사진은 그
21살 때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 첫번째 사진은 가슴아픈 기억이 담긴 사진이지만 그래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다. 내가(가운데) 끔찍히 좋아했던 둘째 올케(왼쪽, 남옥희)와 지금은 서울로 시집을 간 가장 친한 친구(오른쪽, 김용자)와 셋이서 찍은 사진이다. 올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사진들을 방바닥에 주욱 늘어놓고 보면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와있는 곳은 영등포역. 석탄을 때고 달리던 기차를 잡아타고 서울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첫번째 사진은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 집으로 내려오기 위해 잡아 탄 기차에서 아쉬운 마음 달래며 찰칵! 이 때가 19살이었으니 사십 년 지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