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만난 친구들 우리는 어느새 10대 소녀가 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고대면은 손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들도 손씨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 사진들은 고대면 대촌리 큰말에서 같이 태어나고 자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첫번째 사진은 1970년도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열 여덟쯤 되었을 때인데도 많이
선명하고 깔끔하게 나오는 칼라사진보다 예전의 흑백사진이 정겨울 때가 있다. 사진의 질 문제가 아니라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아련한 추억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고 소풍 갔던 고등학교 시절, 첫번째 사진은 친구와 함께 소풍 가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면서 찍은 사진이다. 소풍때는 장소가 어디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끼리 모여서 어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첫번째 사진은 월사금도 못낼만큼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난했지만, 그 시절에는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살았다.
지금도 가끔 꺼내놓고 보곤 하는 이 사진들은 그동안 내가 살아 온 역사의 기록들이다. 사진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살기 쉬운 일들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빛바랜 사진들을 보면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한참동안 기억을 더듬어 나가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새롭게 떠올랐을
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힘을 갖고 있다.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되살려 주고 현재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힘이 있다. 내가 산에 자주 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에 기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산은 만병통치약쯤 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형을 쫓아다니다 우연히 가게 된 태권도 도장. 이 첫발이 내 인생을 바꿔놓게 될 줄은 몰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태권도를 해왔지만 제대 후에는 컴퓨터에 매력을 느껴 컴퓨터 관련 직업을 택해 2년 정도 근무했다. 그러다가 형이 운영하던 체육관을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작
누구나 쉽게 잊지 못할 대학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마련해 두고 살 것이다. 나에게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한울회’라는 봉사동아리에서 활동할 때다. 대학 1학년, 가을이 한참 무르익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한 달에 한 번씩 개태사 역 근처에 있는 계룡학사 아동복지시설에 찾아갔었다. 첫번째 사진은 그 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에 굶주려 있는
누구나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을만한 추억 한가지쯤은 가지고 산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식 키우는 어려움이야 말로 다해 무엇하랴만은 그 기쁨 또한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느지막이 그 기쁨을 남들보다 두배로 누리고 있는 나로서는 웃음이 절
언제나 시끌벅적 요란스럽던 학창시절. 당진중학교 3학년 때 영랑사로 소풍을 가서 같은 반 친구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사진찍을 때면 항상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것이 유일한 포즈였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사진쩖) 호서고등학교 1학년 때 군민회관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서. 그 당시 유행하던 TV코미디 ‘동물의 왕국’을 재연
들판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개구리, 메뚜기 한마리가 장난감을 대신하던 그 시절. 장난감 권총 하나에 들떠 정신없이 뛰놀던 합덕읍 흥덕초등학교 1학년 때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까지 걸어서 소풍을 갔다. 너무 멀어서 힘들다고 말렸건만 끝내 검정고무신을 신고 서부영화에 나오는 존 웨인처럼 권총을 허리에 찬 채 쫄랑쫄랑 소풍에 따라온 동생 선영이(앞줄 왼쪽), 추사
삐딱하게 걸친 모자 하나로 멋을 내고 폼을 잡던 꿈 많은 학창시절.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당시에 몇 안되는 볼거리 중 하나였던 영탑사와 면천초등학교의 은행나무를 보러 당진에서 500원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면천으로 놀러갔다. 항상 어울리던 학창시절 그 친구들. 지금은 저마다 사회의 곳곳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대학교 2학년과
세월이 참 짧다. 이제 연말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내 나이에도 일년이 더 보태지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송이가 땅에 닿자마자 녹는 것처럼 짧고도 짧은 것이 인생이다. 그 짧은 세월에 대한 위안이라면 항상 당신과 함께였다는 것. 당신 생각나는가. 서로 얼굴도 한번 못보고 결혼식을 올리던 그날. 그런데 내년이면 벌써 금혼식을 치러야할 결혼 50주년을 맞는다
나이를 먹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 학창시절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학창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 꿈 많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때 친구들과의 우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불혹의 나이에도 그 때가 생각나는 건 야박한 세상 인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번
지금도 이 사진들을 보면 어려웠던 그때 생각이 난다. 끼니걱정으로 하루를 보낸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려서부터 객지를 돌며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도둑질 말고 안 해본 일이 없다. 맨 위의 사진은 39년 전 월세를 내고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할 때다. 인쇄용지도 팔고 빵도 떠다 팔고 라면도 끓여 팔았다. 그래도 어렵기만 했던
첫 직장과 두번째 직장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2년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석문면사무소에 발령을 받은 나는 부푼 마음에 어릴 적부터 함께 어울려 지내던 합덕 도리 아래새뜸(도리는 안뜸과 윗뜸, 아래새뜸으로 자연마을이 이뤄졌다)의 친구 6명과 함께 수덕사로 놀러갔다. 다소 쌀쌀했던 날씨로 기억되는 이른 봄, 수덕사의
초등학교 6학년때 수덕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수학여행도 해외로 가는 시대지만 그때 당시는 해외는 고사하고 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다려지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부모님께서 수학여행을 간다고 새 옷 (일명 ‘꼬까옷’) 이라고 사주신 것이 체육복(그 당시는 대개 ‘츄리닝’이라고 통칭) 한 벌이었다. 그것도 오래오래
위 왼쪽 사진은 큰형이 군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맨 뒤쪽이 큰형이고 앞쪽 왼쪽은 작은형 그리고 나다. 지금 기억으로 큰형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추운 겨울이어서 형제끼리 눈 싸움도 한 기억이 나고 큰형이 귀대할 때 자장면을 사주고 갔는데 그때 그 자장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요즈음 입이 고급으로 변해서인지 그 당시 그렇게 맛있던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복도에까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가 들어가 보니 아이들 둘이 아빠의 낡은 사진첩 속에 낯설지 않은 아빠의 어린시절 사진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들의 즐거웠던 한때를 물씬 느껴볼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20년이 훨씬 넘어버린 일이건만 바로
당진시내에서 유일하게 휴식공간이었던 남산. 어린이날 가까운 곳에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졸라대는 아들 손에 이끌려 찾아온 남산.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엄마인 나를 카페나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데려가곤 한다. 예전에는 생활이 어려워 재미있는 놀이동산에도 못 데려가고 남산에만 데리고 와도 친구에게 자랑거리가 되었던 지난 날. 남산 학유정 계단입구에서 폼을 잡
1985년 5월 어느 날 예비군 오토바이 기동대 발대식을 가졌다. 간첩침투 등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소지한 예비군 대원들을 엄선해 만든 오토바이 기동대는 내가 창안한 것으로 우리지역에서 처음으로 생겨나 한때 일선 부대에 히트를 치기도 했다. 나(사진의 맨 앞)를 필두로 50여명의 대원들이 라이트를 켜고 당진1교를 지나 시가행진하는 사진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