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시려워도 우리들의 옷을 빨아주시며 함박웃음을 지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아름다운 시절, 지금처럼 세탁기도 없었던 때 그래도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손가락을 호호 불며 눈사람을 만들고 곰돌이 닮았다며 사진을 찍어달라던 녀석들의 빨간 두 볼은 난로 불에 달구어진 무쇠 모양이었다. 세월이 빠
1985년 군대가기 전에 남산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 당시에는 장발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단속이 도시 만큼 심한 건 아니었지만 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 도망다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장발머리가 왜 단속대상이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다.연애시절 함께 했던 해운대 작년에 아내(노영란, 34)와 함께 해운대를 찾았다.
1976년 수학여행, 이날 목적지는 삽교천. 가장 친했던 친구 종우(왼쪽)와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명찰이다. 그 당시엔 수학여행을 가는데도 명찰을 달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2002년 현재, 종우는 대전에서 조그마한 유리공장을, 난 서울에서 제일상선(해운업)에 근무하고 있다. 자가용으로 서울에서
1981년 정미초등학교 가을운동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그 당시 지폐로 된 500원이라는 거금을 주셨다. 어릴 적부터 꾸미길 좋아하고 끼가 많던 난 그 돈으로 다른 아이들처럼 과자나 아이스크림 대신 썬글라스와 목걸이를 샀다. 지금은 아빠가 자주 편찮으셔서 가슴이 아프지만 사진 속의 아빠는 건강하셨고 늘 나의 결정을 믿어주시며 사랑으로 날 지켜주셨
박순생(73세) / 우강면 송산리 우강면 부녀회장을 시작으로 당진자유총연맹 회장까지 20여년간 여자의 몸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전화나 차가 없었기 때문에 당진 곳곳을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봉사하던 기억은 아마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평생 늙었다. 가끔 거리를 다녀보면 나를 알아본 사람들은 “어이구, 많이 늙어셨네요”하고 회한
윤영용(72세) / 합덕읍 옥금리 늙어서 보려고 사진을 찍나보다. 열 일곱 살의 앳되기 만한 내(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얼굴이 이젠 굵직굵직한 주름 밭이 되었다. 그때는 무엇을 꿈꾸고 사랑하고 어떤 것을 갖고 싶었는지... 내 나이 이제 일흔 둘, 까마득한 세월을 건너뛰어 잠시 열 일곱 살 그 시절로 젖어든다. 남학생들과의 접선(?) 장소였던 빵집, 한
나는 월요일을 기다린다. 왜? 당진시대 신문이 오는 날이기 때문... 그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라는 페이지다. 오늘은 누가 어떻게 무슨 사연으로,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사나? 참 좋은 공간인 것 같다. 나도 몇 차례 이 페이지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했는데 용기가 없어서 몇 번이고 망설였으나 큰 용기를 냈다. 나는 지난 3월8일
김동예 (68세) / 합덕읍 운산리, 합덕대건노인대학 3년 13살 때 8.15해방을, 그로부터 3년 후 6.25를 겪었다. 전후세대들은 꿈도 꾸지 못할 무섭고 두려웠던 시절. 그 악몽 같은 나날들의 기억은 나를 따르던 옆집 동생과 함께 찍은 50여년 전의 흑백사진처럼 은은한 음영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리고 또다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도래했고 사람들은 이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6.25 당시 나는 제5사단 35연대 하사로 근무했었다. 강원도 인제에서의 치열했던 야간전투. 적군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아군의 방어선이 허물어졌다. 머리 위로 지나가던 총탄과 휘날리던 포탄, 간밤의 정적을 무참히 깨어버린 폭음들.당황한 아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폭음이 들렸고 그것으로 그 밤의 기억은 끝이 났다. 파편을 맞고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깨어보니 병원이었고 아군의 전세와 함께 밀리고 밀려 대구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사진은 그때 같은 병실에 있던 전우와 찍
구본기 / 순성면 봉소리, 합덕대건노인대학 2학년 40여 년 전의 내(아래사진) 모습은 말 그대로 어여쁜 새색시다. 결혼하고 두 달 남짓 지났을 때 인천 송도에 나들이를 갔다가 남편이 찍어준 사진이다. 남편과 나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다. 1·4후퇴 때 열 여섯 살의 나이로 아버지 손을 잡고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남편과 중매로 인연이 닿아
1978년 여름, 제일 많이 싸웠던 셋째오빠와 장고항 앞바다를 찾았다. 지금은 석문방조제로 바뀐 그곳에서 요즘엔 비싸서 먹기도 힘든 게를 잡았다. 장고항 앞바다는 엄마랑, 친구랑, 오빠랑 함께 게, 소라, 바지락, 낚지, 맛조개, 굴 등을 잡으며 놀던 우리들의 놀이터였다.(아래 사진) 그리고 여름에는 우리들의 수영장이기도 했다. 사진(위 사진)에서도 볼 수
우리 세 식구가 꼭 부둥켜안고 자던 단칸방. 월 4만원씩 내고 살던 당진성당 밑 그 작은 사글세 집. 벌써 16년 전 일이라지만 마치 어제 겪은 것처럼 또렷이 떠오른다. 식당에 일을 나가던 나는 밤 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9살 은희와 6살 재욱의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을 보면서 하루의 시름을 잊던 날들이었다. 그날도 역시 밤늦게 귀가한 나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고등학교 시절, 소설 ‘상록수’를 읽던 중 같은 반 친구의 집이 있는 당진에 놀러왔다가 ‘EFFORT'라는 클럽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남편(윤병혁)을 만났다. 첫눈에 이 사람이다 싶었다. 그런 이유로 서울 토박이인 내가 대학입학도 뒤로하고 당진사람이 되었던 것이다.위 사진은 과수원에 햇사과가 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찍은 사진이다. 26년 전 우리 큰아들 필현이(사진의 오른쪽)와 딸 소현이(사진의 왼쪽)를 보니 그때가 문득 떠오른다. 남편이 약혼기념으로 심어놓은 사진 속의 사과나무는 우리 아이들과
부모님의 뜨거운 교육열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녀야 했다. 물 설고 땅 설던 서울에서의 외롭던 자취생활. 내 쓸쓸한 마음을 메워준 건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함께 몰려다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것 없었던 그 시절. 모두들 지금은 나(사진의 맨 왼쪽)처럼 자식들 딸린 중년의 아버지가 되어있겠지. 24년 전 그때처럼 함께 모여 대포 한 잔 기울이고 싶다. 그 뒤
우리 철부지 막내아들 희성이가 지난 3월 군대에 입대했다. 재대한 큰아들을 맞을 때는 세상이 다 내 것 같더니만 막내가 훌쩍 입대하자 마음이 휑, 적적함을 달랠 수 없다. 잘 다녀 올께유. 한마디 바람같이 던져놓고 성큼성큼 멀어지던 막내. 내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다섯 살 젖먹이가, 워낙 개구져서 몸 성할 날 없던 까까머리 열네 살 그 어린 것이 어느새
딸의 강요에 의해 찍은 가족사진 1990년 3월1일, 홍구(아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일하는 곳을 찾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리오서점 앞에 VIP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다. 동생의 첫나들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자고 제안한 아름(딸)이. 그래서 아내(박서진)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게 됐다. 유난히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아름이는 지금도 카메라
22년 전 4월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아마 요즘 같은 날씨였으리라. 대학생이던 형님이 카메라를 들고 내려왔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남매들은 출타하신 아버지를 빼고 어머니와 시골집 뒤뜰 보리앵두나무 앞에서 햇빛이 눈에 부신 듯 잔뜩 찡그린 채 어설프고 시골스러운 포즈로 사진촬영을 했다. 그 후로 얼마 후 5.18이 일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평온하고 안락
동네의 천주교 신자들이 십시일반 헌금해서 스스로 지은 공소(기도처). 동떨어진 동네에 기도처가 생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지치는 줄도 모르고 찰칵, 우연히 사진을 찍었었다. 뒷산의 나무를 베어 우리들 손으로 직접 지은 것이기에 이 곳에 모여들면 신자들의 얼굴엔 기쁨이 충만했다. 그렇게 2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기도문을 낭독하고 우리들에게 이러한 기쁨의 공간
46년전의 당신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봄바람이 거세게 부는 무료한 오후, 딱히 할 일이 없어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빛바랜 사진첩이 비쳤다. 아무 생각 없이 펼쳤을 뿐이었다.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듯 묵은 소리와 함께 힘없이 펼쳐진 페이지. 거기에 46년 전, 부케를 안고 있는 당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 어찌
밥먹듯 배를 굶주렸던 시절, 어린 마음에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우선 풍족한 음식이 있어 좋았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할머니의 회갑잔치가 있었다. 큰 사진은 그때 모처럼 모인 일가친척들이 집 앞의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찍은 것이다. 고이 한복을 차려입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사이에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쓰며 할머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