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수와 나는 가장 친한 천안농고 동창 사이다. 사진은 천안농고 3학년때인 1963년 12월 부산 해운대로 수학여행을 가 우리 사이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찍어놓은 것이다. 사진 왼쪽이 나이고 오른쪽이 친구 전학수다. 우리는 천안 문화동에서 하숙을 하던 시절, 태권도를 하고 난 후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4
채시라와 함께 여명의 눈동자 출연 30년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여섯 살 때 과수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송산면 금암리에 있던 우리집 과수원에는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가 무성하였다. 그곳은 우리가 놀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불장난을 하다가 과수원을 홀랑 태울 뻔한 일도 있었다. 나무에 기대어 포즈를 잡은 여섯 살 짜리의 모습과 표정이 제법
1980년 3월.나는 시골에 사는 이쁜 색시에게로 늦장가를 갔다.어찌어찌 서른 나이를 꼴딱 넘겼지만그래도 3월 좋은날에 나는 청양군 청양읍 형산리에 사는 신부를 맞기 위해 친구들인 함진아비들과 늠름하고 씩씩하게 청양고을을 횡단하고 있다.신부집 마당에 초례청을 차리고 구식결혼식을 올렸다.이쁜 색시는 이때 스물 셋.꽃다운 나이였던 아내 이경숙은 22년이 흐르는
1994년 마을에서 뜻이 잘 맞는 동창 세 부부가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성산일출봉 근처 유채밭. 나를 만나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있는 아내. 양식에, 농사에, 식당에 끝없이 이어져온 힘든 일에도 힘든 내색없이 나를 도와주는 아내. 부모님 잘 모시고 아들형제도 건강하게 키워주었다. 남편인 내가 봐도 사람좋고 늘 고마운 그녀를 유채밭에서 덥석 안아주었다. 고향
결혼을 하면서 당진을 떠났다가 사업상 다시 고향에 오게됐다.뜻했던 바는 아니지만 고향은 고향만이 갖고 있는 뭔가가 있어서 좋다.오래된 앨범들을 뒤적이다가 기억도 어렴풋한 어렸을 적의 사진들을 찾아내고 얼마나 신이 났던지…부모님께서는 군청앞 골목에서 성원양복점을 운영하셨다.한참 후에 스위스 제과로 바꾸었다가 지금은 2층 「하늘교육」자리에 내가 와있다.사진속의 양복점은 35년전의 모습이다.아버지 등에 안긴 갓난아이가 나니까. 이 양복점 자리는 다른면에서도 유서가 깊다. 양복점 자리에서 할머니는 「충남당」 빵집을 하면서 작은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내 딸아이가 내년이면 중학생이 된다친정집에 갔다가 무심코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내 딸아이보다 꼭 한살 많았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지금부터 25년전 중학교를 갓 들어가 입었던 하얀 세라복 상의 교복에 까망 교복치마, 그리고 귀밑으로 살짝 내려온 단발머리.그때만 해도 우리의 놀이장소는 산과 학교, 운동장, 그리고 논과 밭이 고작이었던 시절, 한적하게 방과후 몇몇 친구들과 추억하나를 만들었다.지금 학생들은 어느정도 머리도 자유화되고 사라졌다 다시 부활한 교복은 디자인도 색깔도 참 다양하다.내 딸아이가 교복을 입고
우리가 놀던곳도 집위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무슨무슨 꽃들도 피어있었고 풀도 많았다. 경희, 진희, 선희 세자매는 선희의 돌을 맞아 이렇게 햇볕 좋은 꽃동산에 앉아서 놀았다. 첫돌배기 아이였던 선희가 이제 서른 세살의 주부가 되었다니 기가 막히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꼭 귀여운 막내 남동생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진희도 세아이의 엄마가 되었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불과 몇년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어서 마음에 깊이 남아있는 일이 있다.97년 8월 휴가를 얻어 우리 일행은 지리산 산행길에 올랐다.무려 16시간을 걸은 우리는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천왕봉 바로 100m아래인 위험지대에 텐트를 쳤다.비는 조금씩 내렸지만 아침이면 그치려니 했다. 그러나 비는 다음날까지 계속내렸다. 우비를 준비해온 사람도 없었다. 생각끝에 비닐로 우비를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닐조차 넉넉하지 않았다.어렵게 어렵게 천왕봉 정상까지 오른 우리는 그냥 내려갈 수 없어 아쉬운대로 거지
사진 하나. 초등학교 3학년 운동회날. 오전을 신나게 뛰고나서 엄마와 언니, 이웃분들과 맛나게 점심 도시락을 먹는 광경이다. 웬 시골집인가 싶은 식사장소는 다름아닌 당진향교. 가운데 검게 그을린 언니와 나는 먹는데 여념이 없고, 엄마도 모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계신다. 그 맛난 도시락의 맛은 이제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추억의
아버지 품에서 보낸 나의 짧은 유년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내 나이 세살되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몇 가지 다른 자료 속에 남아 계시다.그 자료 중 하나가 이 사진들이다.단기 4287년(1954년) ‘송악민병대’사진으로 아버지가 역사속에 서 계셨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52년도에 창설된 송악민병대는 6·25전쟁에서 지역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비정규군이었다. 사진은 전쟁 끝무렵의 민병대 모습이다.나이 20대에서 40미만의 젊은 남자들이 여기에 참가한 것으로 알고있다.뒤로 세째줄 가운데 두드러지게 큰 분이 아버지시다.아래는 일
책상을 정리하다 33년전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약혼사진을 발견하였다. 당시 서산 기상대에서 공직에 몸담고 계시던 장인어른은 중매로 태안 원북에 사시던 장모님을 만났다. 결혼식도 아닌 약혼식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던 풍속이 요즘의 시각으로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맏아들이었던 장인어른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좇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대덕리에서
1961년 초여름 석문중학교. 중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들은 이준용 담임 선생님과 학교 교정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뒤줄 왼쪽부터 최길순, 홍희표. 이경숙, 인명숙, 조문자. 그리고 앞줄에는 이옥자와 선생님, 김삼자가 나란히 앉았다. 그로부터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수소문 끝에 당시 담임선생님이셨던 이준용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께서는
당진초등학교 3학년 영랑사로 소풍갔을 때의 사진이다.한창 개구장이 시절, 함께 어울리던 동무들과 사진을 찍었다.영랑사 대웅전과 돌계단의 모습은 그대로 인데 사진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32살의 어른이 돼 있다.오른쪽 하단의 큰 키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당시 조일형 담임선생님께서는 현재 당진교육청 장학사로 재직하고 계시다.뒷줄 가운데 빨간 잠바를 입은 어린아이가 바로 나다.친구들 중 뮤직박스의 최현준, 누리측량설계의 김정진, 아산에서 직장에 다니는 이영구, 그리고 차규현, 신영철, 임승호 모두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한 선 근 / 당진
내년이면 노인 소리를 듣는 나이 예순이다. 언니는 벌써 환갑을 넘겼다. 언니와 나는 모두 결혼해 자식을 다섯씩 두었다. 많은 가족들 틈에서 다복하게 살지만 언니와 나의 이 사진 한 장에는 언니와 나만 아는 슬픔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언니는 스물 한 살, 나는 열여덟이었던 그 때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데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다. 언니는 내게, 나는 언니에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제일처럼 손에 잡힐 듯한 추억. 사진 찍을 때 우리가 눈을 모아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카메라 렌즈였다고 말한다면 정말 썰렁하고 1차원적인 답이다.그때 이미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그리워하게 될 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가 바라본 것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허공이고 그리움이다.....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떠나간 사람들이 해마다 첫눈으로 내린다는 것처럼 지극한 그리움이 또 있을까.그때 우리가 보았던 그리움들이 10년 지난 지금 우리들 저마다의 가슴에 비처럼 햇살처
믿을 수 없겠지만 이 흑백사진 한장이 당진초등학교 61회 졸업앨범이다.지난 1976년도 하반기에 느닷없이 정부로부터 물자절약에 관한 지시가 떨어져 당시 6학년 1반부터 4반까지 전체 동기생들이 이 사진 한장으로 졸업앨범을 대신했다.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우리 뒷편에 있는 목조건물이 당시 학교 나이와 똑같은 61년 된 본관건물이다. 이 건물의 모습은 이 사진 이후로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우리가 졸업하던 해 새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뒷편에 있었던 3학년 건물, 그리고 지금
당진화력 건설로 사라진 석문산 황룡굴 하나석문산은 석문면이 석문면인 이유가 되어주는 곳이다.당진화력이 건설되기 전에 석문산에는 두 개의 커다란 굴이 있었다.석문산에 얽힌 전설로 황룡이야기가 있는데 하나의 굴은 황룡이 살았던 굴이고또 하나의 굴은 황룡이 들어가 죽었다는 굴이다.사진 속의 굴은 황룡이 들어가 죽었다는 굴로 안타깝게도 당진화력 건설로 없어지고 말았다.젊은 시절 굴 안에서 밖을 향해 찍은 친구의 인어같은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유일하게 굴의 형체를 담아놓은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깊은 아쉬움과 일말의 안도감을 느낀다.조 선 형
제법 잔 물결이 일던 그곳에서 젊은날의 시름을 달래곤 했다. 바쁘고 힘겨운 나날이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는 젊은이. 집배원 복장의 그는 어디로 갔나. 그는 지금 중년이 된 내안에 있다.망망대해도 아닌 그곳에서 물살의 쉼없는 활동을 보면서, 일어서고 사그라지고 다시 일어서고 사그라지고, 밀려오고 밀려가고, 다시 밀려오고 밀려가는 삶의 그침없는 리듬을 느끼고 나도 다시 일어서곤 했다.그리운 저수지, 내마음 방죽은 지금 없다. 그곳에는 공설운동장이 들어서 있다. 그 가까운 곳에 있던 고대우체국. 이것이 1970년대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둘째딸 순희의 학창시절 모습이다.왼쪽사진은 계성초등학교 6학년 때 소풍가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뒷줄 왼편에서 첫번째 여자아이가 순희다.일년중 가장 기다리던 가슴 벅찬 날이었음에도 사진 찍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일행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뻣뻣하게 굳어있다.당시의 단발머리차림과 함께 김밥과 달걀, 사이다가 들어있을 소풍가방이 무척 인상깊다.오른쪽 사진은 순희가 당진여고 재학시 하교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에서 두번째가 순희인데 무척이나 의젓해진 모습이다.지난 8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이제는
당진읍 시곡리에 사시는 둘째 외삼촌의 지난 추억이다.외삼촌의 성함은 이. 회. 선.스물일곱에 결혼식을 올리셨다는 외삼촌이 올해로 61세가 되셨으니 근 35년 전의 일이다.외삼촌은 이때 결혼식을 마치고 막 댁으로 들어오는 길이셨다.차도 드물었을 때일텐데 차 뿐만 아니라 신혼차량을 장식한 꽃과 풍선들이 어쩌면 오늘날의 그것과 똑같을까 감탄사가 절로 난다.사진 속의 신랑은 차안에 있고 외갓댁 맨 왼편에는 첫째 외삼촌이 서서 기다리고 계시다.그런데 또 다른 사진은? 아뿔사! 차가 논에 빠졌나보다.김 창 규 / 당진읍 시곡1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