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지역 당진에서 일어난 작은 지역운동의 한자락을 이루는 역사다.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은 가까운 역사지만 감회가 깊은 것은 그 시절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따스한 추억들 때문이다.당진사랑이라는 조그만 공간에서 비롯되어 시민모임, 청년회, 학생모임까지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들에 붙여놓은 불처럼 조용하면서도 활활 타올랐다.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우리들은 우리들 대로 작은 일에도 온 신명을 바쳤다. 덕분에 당진에서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일들, 이를테면 사물놀이라든지, 라이브 공연 같은 것들이 종종
당진와이즈멘이 창립하고 2년째 되던 해 찍은 사진이다.1981년 9월19일이니까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이날 당진와이즈멘은 당진정보고(당시 당진상고) 운동장에서 복음화 전도대회와 함께 당시 유일한 축구팀이었던 할레루야 축구단 초청 친선경기를 가졌었다.사진은 학교에서 행사를 마치고 시가 퍼레이드를 위해 교문 밖을 나오는 장면이다.20년전 임에도 한눈에 당진고 정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익은 광경이다.다만 오른쪽에 보이는 가게와 왼쪽편의 자전거점, 그리고 주위 교복입은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이 20년이라는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벌써 34년 전의 사진이다.중앙에 한복을 입고 손을 맞잡은 채 서있는 남녀가 우리 부모님이다.결혼식을 올린 바로 다음날 우강면 창리의 큰집에서 사촌언니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늦둥이로 태어나신 탓에 아버지와 주위의 사촌언니들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사진 오른쪽으로 초가집 담장과 멀리 보이는 백일홍 나무가 당시 농촌풍경을 상징하듯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왼편으로 보이는 밭은 아직도 그대로이지만 초가집과 백일홍은 이제는 모두 없어져 먼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아득한 풍경일 뿐이다.유 정 화 / 당진읍 교동리
73년 남산어귀에 자리잡고 있던 우리집 마당에서의 어느 여름날 풍경이다. 목욕준비 중인 우리 남매모습이 무진 재밌다.오래된 가족앨범 한구석에 튀어나온 이 야한 사진 한장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신문에 공개할만한 사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볼록한 배를 내민 쇼킹한 노출씬에다가 코믹함까지 곁들인 이 한장의 추억이 너무도 정겹고 사랑스러워 감히 공개해서 많은 이들에게 잠깐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로 했다.지금은 서울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으며 지난해 4월에 결혼해서 8월이면 세상에 나올 2세를 기다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네명의 라이벌 그들은 지금…우리는 적이자 동지였다.공부에서건 운동에서건 우리는 서로 지기를 싫어했고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하지만 우리는 동지였다. 서로의 존재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사이였다.이때 우리는 상록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우리는 우리끼리 추억을 남기고 싶어 현충사로 여행을 떠났다.왼쪽부터 이덕재, 나, 임동재, 박정규다.아직 어렸지만 우리들 사이의 라이벌의식과 그것 못지않은 형제애는 참 사나이다웠다고 생각한다.아래 사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하늘을 나는 태권소년, 이제는 아버지가 된…초등학교 시절 어느 멋진 날 하늘을 날고 있는 태권소년.멋있는 폼을 보고 계신 이병노 사범님.친구, 형 등...또한 맞는 연기를 하고 있는 어릴적 친구 지남규(현재 유학).그 꿈많던 태권소년이 본인이다.때는 1978년 당진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그 당시 당진의 유일한 도장이었던 송무관에서의 사진속 꿈많던 동무들은 자기 꿈들을 이루고 살고 있는지...꿈많던 태권소년은 지금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두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다.그것만으로도 꿈 하나는 이루었다.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22년 전의 당진교육청과 형카메라 구입 기념으로 ‘찰칵’안경을 쓰고 지적인 면모를 풍기는 사진 속의 남자는 나의 형이다. 그때 형은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우리집은 그때 교육청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 교육청은 지금의 시장오거리 93프라자 자리에 서 있었다.그런데 형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거기에는 살뜰한 사연이 있다.그때 우리 가족은 어렵게 카메라를 한대 구입했는데 꽤 괜찮은 ‘캐논’카메라였다. 카메라를 산 기념으로 뭔가를 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념촬영이었다. 때마침 가까이에는 교육청이라는 ‘기
1970년대의 일이다. 아버지와 나는 함께 학교에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완전한 새출발을 위해 신학교에 다니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때 당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을 깨달으셨던 모양이다.흑백사진 속의 장소는 아버지가 맨 처음 목회활동을 시작하셨던 충북 옥천군의 한 작은 교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당시의 젊은 여성신도들이다. 사람들 뒤로 보이는 나무 종탑과 시멘트로 엉성하게 바른 교회벽, 아버지 뒤에 있는 십자가가 애틋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칼라사진을 보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전쟁의 페허 위에서 재건 시범마을이었던 ‘신리’ 합덕읍 신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광활한 평지에 자리한 ‘신리’는 평야 중심에 자리한 점과 부농들이 있는 관계로 한국전쟁 중 9.28 서울수복 때 일종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마을의 부농들은 라디오를 통해 서울수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대전리 창고에 가뒀던 좌익인사들이
안 희 환 / 당진읍 읍내리중학교 수학여행 때니까 벌써 40여년 전의 일이다. 사진 속의 풍경은 서울 창경궁이다.공부 잘하라고 부모님에 의해 인천의 여학교로 일찍부터 보내진 나는 늘 고향 당진과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며 살았다.잘한다고 해봐야 고만고만 했을 것을 어린 나이에 굳이 타향살이를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오히려 늘 눈앞에 어른거리는 고향집과 식구들 생각에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쳐서 어른이 된 뒤까지도 그런 종류의 마음의 병을 앓았던 것 같다.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데...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을 클 때까지 곁에다 두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종이단지 만들어놓고 웃음꽃 피우는 어머니요즘 종이찰흙이나 닥종이공예의 원조김 기 성 / 당진읍 읍내리아마 3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집 뒤에 드리운 그림자에 숨어 더위를 이기면서도 어머니들은 가솔들을 위해 무언가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고 계셨다.커다란 독에 신문지와 종이 불린 것을 붙이고 며칠씩 말리면 그것이 딱딱하게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진용이형 장가가던 날나이가 한참 웃대인 사촌 진용형이 장가가던 날이다.식을 마치고 혼례상 앞에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형은 지금도 대구에서 여전히 넉넉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사진 찍는 일이 워낙 귀한 당시였던지라 병풍 뒤에서 일가들은 카메라를 몰래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앵글에 잡힐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사진 옆)마지
포토에세이 / 윤주흥(사진)이 길 위에서 우리가 벗어야 할 굴레는" 물길 열린 무창포에서 식대도까지 "한국판 모세의 기적매년 음력 7월15일을 전후한 백중사리 때면 무창포에서 식대도까지 1.5㎞의 구간에 너비 15m의 바닷길이 드러난다. 이 광경은 흡사 모세를 따라 홍해(갈대바다)를 건너던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연상하게 한다.몇년전 MBC가 성지현장을 순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사진 한편에 담기에는 너무 소중한 노력들소난지 의병항쟁이 역사 위로 올라온 순간 1982년 석문중학교 교사들이 소난지도 의병총에 비석을 세우는 장면이다.을사조약에 반기를 들고 일제와 싸우다 산화해간 홍일초 휘하 150여 한말의병들의 피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소난지도 의병항쟁의 역사를 발굴하고 남기는 작업은 전적으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민둥산에 나무 심으러 가는 석문중 학생들삼천리 금수강산도 가난으로 헐벗어야 했던 60~70년대를 거쳐 80년대 우리의 청소년들은 조림사업에 대대적으로 동원됐다. 나무뿌리까지 캐어다 땔감으로 써야 했던 시절을 보내니 산이란 산은 죄다 붉은 민둥산이 되어 있었기 때문.사진 속의 광경은 80년도 봄 석문중학교 학생들이 장고항에 있는 학교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아니 내가 태어난 원인이 된 일이다. 엄마 아버지께서 백년가약을 맺고 쑥스럽게 카메라 앞에 서셨다. 아버지는 기분좋은 웃음을 의젓한 주먹 속에 감추고 계시고, 엄마는 수줍은 얼굴에 정든 친정을 떠나는 슬픔도 담고 계시다. 이렇게 해서 날들이 가고, 이렇게 해서 나와 내동생이 태어났으며 그 뒤로도 많은 날들이 간 뒤 이제는 내가,
아름드리 벚나무에 흐드러지게 꽃이 필 즈음 고찰은 상춘객들로 흥청댔다20여년전 영탑사의 봄20여년전 영탑사의 봄이다.아름드리 왕벚나무가 대웅전 지붕을 덮을 만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울 즈음이면 상춘객들로 고찰도 함께 흥청댔다.학생들에겐 봄소풍 1번지이자, 대웅전 앞마당에 무대를 설치해 놓고 면민노래자랑까지 열었던 곳.초파일이 되면 저수지며 주변 산에는 사람들
고대면 면소재지에서 고대농협과 고대우체국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한쪽길이 정미로 이어지는 진관 3거리가 나온다. 그 3거리가 포장되기 전, 그곳에는 키 큰 미류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즐비했었다. 하늘을 향해 ‘쫙’ 뻗은 미류나무는 어린시절 꿈의 상징이었다. 그 앞에 선 내 모습도 그처럼 거침없어 보인다. 지금은 이곳에 돌과 흙 대신 아스팔트가 깔렸고, 미류나무와
한복입은 학예회,갓쓰고 구경온 어르신 학예회 날입니다.여자 아이들은 내복 종아리가 다 보이는 개량한복을 입고 강당무대에 섰습니다. 오른쪽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째 엇갈려 설 줄도 몰랐었는지 자로 잰듯이 일렬로, 앞사람 뒷꽁무니를 보고 섰습니다.강당이라는 곳은 여러 칸짜리 교실 칸막이를 떼어내면 만들어지는 넓은 공간이었습니다.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