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나고 자랐다. 기지시리에서는 고조할아버지부터 6대가 살았다. 어릴 적 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일을 했다. 그러다 친구인 최은범 당진축협 전 조합장의 도움으로 양돈을 시작했다. 나는 초가집에서 어미 돼지 2마리로 양돈을 시작했고, 이후 한우 70여 마리를 키우기도 했다.옛날 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을 되새겨 보니 좋았을 때도, 힘들었을 때도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나와 아내의 결혼사진이다.내 나이 26세, 아내 나이 22세에 결혼했다. 우린 서산에 위치
>>최덕기 씨는·1944년 송산면 매곡리 출생·송산초 졸업·전매청에서 26년 간 근무 (현 KT&G)·송매감리교회 장로송산면 매곡리에서 태어난 나는 송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이후 서울에서 생활하다 고향을 찾았다. 그리곤 26년 동안 현 KT&G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고구마, 고추, 콩 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농사일을 전혀 할 줄 몰랐었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어린시절 나의 증조부께서 송산면장을 하셨다. 당시 당진시, 당진
합덕청소년문화의집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진원 청소년지도사는 합덕읍 소소리 출신으로 합도초와 합덕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이곳의 토박이다.지금은 합덕청소년문화의집에서 청소년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친구의 권유로 합덕청소년문화의집을 알게된 뒤, 나아가 청소년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그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 소극적인 성격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거듭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졌단다. 또 진로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청소년지도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아동청소년
나는 1995년부터 복합기 렌탈 전문 및 수리업체인 당진사무기를 운영하고 있다.요즘엔 고객들이 직접 기기를 사기보다는 대여해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직접 기기를 사다보면 기계와 소모품 구입을 비롯한 유지비 등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여해서 사용하는 것이 비교적 저렴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요즘엔 체인점이 많다보니, 중앙본부가 사용하는 업체에서 일괄 구입한다. 그러다보니 지역업체는 어려움이 많이 느끼고 있다.집중호우 때문에 1998년 이전에 찍은 사진이 없어졌다. 당시 사진 몇 장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해서 아들 돌 사진 등을 인화해봤
정미면 천의리 출신의 나는 서산시 운산면 출신의 아내(김계익)를 만나 29세에 결혼했다. 결혼한 지 어느덧 56년이 됐다.나는 당진군청에서 퇴직한 뒤 고대면 진관리에서 사과농사를 지었다. 농사짓느라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공직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사과농사 운영을 시작했고 24년 간 이어졌다. 퇴직하고 열심히 농사에 매진하겠다고 했으나 허리디스크로 3년 간 일을 쉬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농장을 가꾸지 못했고 결국 사과나무가 죽어 농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현재 나와 아내는 집 인근에서 땅콩, 강낭콩, 배추, 무 등 다양한 밭작물 농사를
성환전투에서 패배한 청국군은 공주에 있는 대장 섭사성을 찾아 떠났다. 청국 병사들은 공주로 남하하면서 내포지방을 경유하게 되는데 청국병사가 지나는 내포지방 전역에서는 약탈과 노략질이 이어졌다. 이렇게 공주에 모인 청국병사들은 천만다행으로 청주로 우회하여 지원군이 파병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하지만 걸음이 늦거나 부상당한 청국병들은 낙오자가 되어 조선에 버려졌다. 이들 낙오병들은 어찌 되었을까? 일부는 청일전쟁 이후 동학농민군에 의탁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동학농민군에는 청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국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
나는 반남 박씨, 연암 박지원 선생이 나의 고조할아버지다. 고조할아버지가 면천에 오면서 5대째 당진에 살고 있다.세 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950년 셋째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게 무척 잘해주셨지만, 나는 하교하면 곧장 친어머니에게로 갔다가 안 간 척하고 다시 작은아버지의 댁으로 가곤 했다. 내가 적응하지 못하자 결국 어머니와 동생이 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됐다.나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하게 됐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큰형님은 군에 입대했고 남자라고는 나뿐이어서 일을 하지
합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가 8남3녀였는데, 남형제 중엔 내가 맏이였다. 어릴 적 누나와 나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한 초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께 입학시켜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결국엔 학교 대신 10세 때 글방(서당)을 다니게 됐다. 이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내 동생들은 모두 학교를 다녔다. 벼슬이었던 할아버지 덕에 나는 배고픔 없이 자랐다. 당시 보리밥도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쌀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많다.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앨범에 정리해 모아뒀는데, 오랜만에 사진들을 들여다 보니 옛 추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나는 고대면 장항2리가 고향이다. 어려서는 인천에서 생활했고,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경황없이 고향인 당진으로 피난 와 정착하게 됐다. 학교를 졸업한 뒤, 조금초등학교와 석문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석문중학교에서 40년 간 재직한 뒤 교원정년단축 정책에 맞물려 기존보다 3년 빠른 1999년에 퇴직하게 됐다. 퇴직하
나는 대호지면 장정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했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했다. 서울과 인천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고, 부모님을 모시고자 29세 때 고향으로 내려왔다.대호지면 장정리 새마을지도자는 올해로 6년 째 활동하고 있다. 지도자 생활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그동안 지도자로서 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2012년과 2014년에 우리마을 사랑운동에서 최우수 마을로 선정됐다. 마을길에 예쁜 꽃을 심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길을
>>홍종옥 씨는·1949년 석문면 삼화1리 출생(현 68세)·전 운학리 부녀회장(12년 간)·현 당진2동적십자봉사회 회원·현 바르기살기운동 당진시협의회 회원·현 당진농협 생활개선회 회원·현 당진2동 보라세탁소 운영 석문면 삼화1리 출신의 나는 남편 (김순서)과 함께 당진2동에서 보라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19세에 상경했다가, 다시 당진을 찾았고 어느덧 42년이 지났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보라세탁소는 30년 전 쯤 개업했다. 옛날 사진을 보니 너무 재밌다. 사진앨범을 뒤적거리다 옛날 사진을 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마침 중국에
최주묵 고대면 슬항2리 전 이장>>최주묵 전 이장은-1939년 당진시 고대면 슬항2리 출생-고대초·당진중 졸업-전 고대면 슬항2리 새마을 지도자 4년-전 고대면 슬항2리 이장 5년-현 당진시 그라운드골프협회 전무이사-현 고대면 슬항2리에 위치한 반석교회 장로 나는 고대면 슬항2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57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이사갔다. 당시 인천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입학금을 내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천에 위치한 얼음공장에 취직했고 얼마 있지 않아 군대에 입대했다.어렸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이 많다.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지역에서 사회활동을 많이해서 사진이 많다. 사진을 찾으면서 그동안 정리해놓은 사진앨범을 다시 보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나에게도 이랬을 때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식구들에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표현하고 살자고 이야기 한다.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 쌓아놓으면 불화가 생긴다. 내 지론은 욕심을 버리고 사는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 좋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산다면 좋은 날
김덕성 전 운학리 이장>> 김덕성 전 운학리 이장은·1947년 고대면 산성1리 출생·고산초·당진중 인천 동인천고 졸업·운학리 이장(1996~2015)·당진2동협의회장(2012~2014)·당진시이통장연합회장(2014) 우리 집 안에는 가족사진, 여행사진 등 여러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했기에 여행도 자주 갔고, 화목한 가족으로 불렸던 만큼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도 많다. 하지만 장남인 면수가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되면서부터는 사진을 잘 찍지 않게 됐다. 아들을 돌보면서 여행가는 것도, 사회생활하는 것도 멀어
나는 사진이 많다. 군대에서 찍은 사진, 아내와 찍은 사진 등 다양하다. 이용원에서 20년 간 일하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용사로 오랫동안 일했지만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사일은 재밌다. 농부의 마음이 그러하듯 노력한 만큼 농산물이 잘 자랄 때면 보람을 느낀다. 첫 번째 사진은 베트남전쟁 파병 당시 찍은 사진이다.당시 먹고살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나도 그랬다. 이 때 찍은 사진이 많다. 당시엔 힘들긴 했지만 추억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 사진은 결혼 전 아내와
예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1978년 당진을 찾았다. 장손이었기 때문에 고향과 가까운 당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고향과 가까이 지내고 싶었고, 당진이라면 부모님 성묘 관리를 신경써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편을 잡았던 나는 당진을 비롯한 경기도 평택시, 안성시에서 총 32년 간 교직생활을 해왔다. 나는 교직생활을 하는 중에도 수지침 봉사활동을 해왔다. 1980년 1월에 수지침을 배웠고 지금까지도 관련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요즘에는 매주 화요일 오전에 3시간 씩 순성면 갈산리에 위치한 아셀복지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껏
서울에서 살다가 당진에 오게 된 것은 시어머니 덕분이다. 당시 시부모님이 송산면 가곡리에 살았는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걱정돼 당진에 내려오기로 결심했다.당진에 내려온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지역에 살면서 송산면 가곡리 부녀회장, 송산농협 농가주부모임 회장 등 여러 활동을 해왔다. 봉사활동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보람있었고, 회원들이 잘 따라줘서 좋았다. 젊은 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면 옛 생각이 나서 좋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가 많았던 나는 당시에 찍은 사진을 많이 갖고 있다. 첫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대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살아왔다. 가진것 없던 나와 결혼해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다. 이제는 아내와 편하게 살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1981년에 아내와 찍은 사진이다.청양 출신인 나와 아내는 한 마을의 이웃이었다. 나의 큰 형과 아내의 큰 오빠가 친구였고, 우연한 기회로 서로를 알게 됐다. 홀아버지를 모시는 효녀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아내와 나는 1년 정도 연애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 사진은 ‘영원히 사랑하자’는 의미로 청양사진관에
초등학생 때는 육상을, 중·고등학생 때에는 탁구를 했다. 1992년부터 당진시 배드민턴 대표선수로 15년 이상 활동했다. 지금은 골프에 푹 빠져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골프연습이다.나는 평생 운동을 해왔다. 지금도 하루에 2~3시간 씩은 운동한다. 이제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플 정도다. 운동의 맛은 우승했을 때의 기쁨과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 운동이 끝난 후 매우 지쳐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희열이라고 생각한다.그 맛을 알기에 내가 지금껏 운동을 하고 있다. 평생을 운동과 함께 했기에 찍어 놓은 사진도 대부분 운동하면서 찍은
군 생활을 할 때 동기가 군인사진사였기 때문에 남들보다 군대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나의 3년 간의 군 생활은 아찔하면서도 즐거웠다. 군 제대 후에도 전우들과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현재 연락이 끊겨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라 아쉽다.나는 정미면 대조리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인천에서 생활했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았다. 현재는 대조리에서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장을 보러 가시면 버스 도착시간에 맞춰 장 봐오신 어르신들을 댁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주된 일과다.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