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몽둥이 들고 왔다”어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전일성·74)가 할머니(신영순·73)를 때리겠다고 무섭게 생긴 몽둥이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에는 칼을 드셔서 너무 무서워 오빠(민수(가명)·12)랑 방으로 도망쳤다. 근데 이제는 덜 무섭다.그래서 내가 할머니를 구해주고 싶어 할아버지한테 몽둥이를 빼앗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치매라고 하셨다. 우리를 위해 요양병원이라는 곳에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셨다.“내 얼굴 안 보이는 할머니”오늘은 할머니가 일을 하러 가시는 날이다. 할머니는 시각장애 1급이다. 내
1년의 시보 기간을 갓 마친 이들이다. 아직은 배울 것이 많다고 하지만 꿈 꿔 왔던 이 길에서 서 있는 지금, 얼굴 한편에 행복이 담겨 있다. 경찰, 누군가에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직업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경찰의 꿈이라는 목표로 달려온 이들이 이제는 완생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10년 만에 결실 이룬 경찰의 꿈이형근 순경은 “경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는 경찰 준비만 10년을 했다. 그 긴 시간을 통해 사랑과 경찰이라는 꿈, 그리고 갓 돌 지난 딸까지
시각장애인 위해 명절마다 쌀·한과 전달빈 몸으로 귀향해 염솔한과 운영하기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다. 푸짐한 보름달이 환히 떠올랐다. 하지만 휘영청 밝은 달빛조차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다. 그들을 위해 15여 년 간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염솔한과 전 대표 권병호(73·정미면 하성리) 씨는 올해도 한과와 쌀로 사랑을 전했다.눈 앞이 캄캄했던 백내장30년 전이였다. 지금보다 몸무게가 20kg는 더 나갔을 때란다. 하루가 지날수록 눈이 흐려지더라. 어느 날은 괜찮다가도 문득 또 앞이 흐려질 때가
당진시청을 들어서면 기분 좋은 커피 향이 코끝에 맴돈다. 하루에 500잔 이상을 판매하며, 일 평균 매출이 100만 원이다. 커피 가격이 밥값을 넘보는 요즘 커피 한 잔을 1500원에 판매하는 이곳에서 100만 원은 적지 않은 돈이다. 공무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 오전부터 민원인들이 들리는 오후까지 충남당진지역자활센터(센터장 조상원)의 카페테리아 사업단은 쉴 새 없이 분주하다.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자활 식구인 3명이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에 도전했다. 또 이명희 씨의 경우 최근 오픈한 모다아울렛의 모 카페에 바리스타로 취직했다. 그야
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핀다. 진흙을 뚫고 나와 꽃을 피어내는 연꽃처럼 민지영(39) 씨가 그랬다. 비록 뇌병변1급 장애로 휠체어에 손과 발을 묶어 놓아야 할 정도로 몸 전체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는 연꽃과 같이 환하게 피었다. 그런 지영 씨 곁에는 항상 엄마 정진숙(64) 씨가 있다. 모녀이면서도 친구 같고 자매 같은 둘이 다시 한 번 꽃을 활짝 피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뇌병변 장애1급 판정을 받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 두 딸이 태어났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동생 지영 씨가 이상했다. 언니와 다르게 뒤집기와 배밀이 등이 서
12년 전 그날이었다. 원래 잔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하기만 했다. 근데 요 근래 배가 아프더라. 별 일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별 일’이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소변을 보고 돌아서려던 그 순간 ‘억’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만삭의 아내가 달려왔다. 나를 깨우고 119로 신고했다. 깨어났는데 속이 안 좋았다. 뭔가 이상했다. 거실 바닥에 연신 토를 쏟아냈다. 덩어리진 피가 나왔다. 그렇게 화목하기만 했던 우리 가족에 불청객 ‘암’이 찾아왔다.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던 우리웃는 것도 닮은 부부는 20년 전 처음 만났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권오봉(69·신평면 거산리) 씨가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으로 자전거로 향하더니 이내 안장에 오른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자전거 페달은 고사하고 손잡이 조차 잡기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이내 힘차게 페달을 돌린다. 그의 인생도 그랬다. 위태로운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암담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고 새롭게 써 내려간 길을 당당히 마주했다.“형님, 걸음걸이가 이상한데요?”어느 순간 문득 손에 마비가 찾아와 글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걷는 데 발이 끌리더니 점차 횟수가 한 번에서
오늘도 박 여사의 발길은 바쁘다. 남편 챙기랴 손주 보러 가랴, 또 마을 아이들까지 돌보랴 한가할 틈이 없다. 그래도 하루가 빠듯한 만큼 즐겁단다. 웃고 또 웃으며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하루가 어느덧 숨가쁘게 흘러간다.6년째 교통지도 나서송산면 금암리에서 살고 있는 박청숙(67) 씨는 올해로 6년 째 원당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지도 봉사에 나서고 있다. 처음엔 손자 희섭이를 위해 시작한 봉사가 이제는 모든 아이들을 아우르며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때로는 부모가 아이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거나, 차량과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위험천만한
전신마비부터 암까지…절망 속에 피어난 희망소외된 장애인들, 사회에서 함께하고파인생 바꾼 단 한순간의 사고1983년 오전 11시 30분. 후진하던 차량이 그를 덮쳤다. 그의 나이 불과 32세였다. 병실에 누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의사는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해도 난 일어날 수 있어’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몸은 마음과 달랐다. 이를 악물고 굳은 다리를 애써 뻗으면 다시 그 상태로 굳을 정도였다. 집에 평행봉을 설치해 매일 같이 걷고 또 걸었다. 이 회장은 “
>> 김원국 회장이 걸어온 길-합덕읍 신촌리 출신-한국4-H 충청남도연합회 회장-사단법인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당진군지회 부회장-바르게살기운동 영등포구협의회 부회장-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 선정-미국 로스앤젤레스 명예시민 위촉-국회입법보좌관-영등포구청 의정보좌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김원국 영등포구협의회장은 “고향은 엄마의 품 같은 것”이라며 “없어서도, 잊어서도 안 될 기둥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4남 1녀 막내 ‘쉰둥이’김원국 회장은 1946년 합덕읍 신촌리에서 4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나이가 쉰이었으니 그는
6.25 전쟁 이후 포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침묵 속에 고통은 깊이 파고들어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강산이 몇 번씩 변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 이산가족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의 허리를 끊어 놓은 휴전선을 건너는 이들로 북한이탈주민은 점차 늘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이탈해 남한에 정착한 주민은 2만7000여 명. 북에서의 삶을 피해 국경을 넘어 택한 남한이지만, 여전히 분단 트라우마와 열악한 환경 속에 숨죽인 채 눈물을 삼키며 살고 있는 현실이다.얼어
김성섭(71·장항2리) 고산초등학교 배움터지킴이는 오전 7시 50분,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겁다. 지난해부터 근무를 시작한 그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행복’을 많이 얻는다고 말한다. 때로는 후배이자 때로는 손자인 이 아이들이 있기에 살 맛 난다는 그다.배움터지킴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배치된 인력으로 등하교 지도 및 외부인 출입을 막는 업무를 보고 있다. 하지만 김성섭 배움터지킴이는 학교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 업무 외에 학교를 위한 다양한 일에 소매를 걷어 붙였다.그는 학교 환경을 위해 산에서 고목
당진시남부노인복지관장으로 박소영 관장이 새롭게 자리했다. 진은심 전 관장은 2년 6개월 간의 관장 업무를 마치고 캐나다 토론토 성 김안드레아 성당의 전교 수녀로 파견됐다.한편 박소영 관장은 1991년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들어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솔뫼베네딕도의 집에서 사무국장으로 업무한 바 있으며 부산광역시 광안동에 위치한 본원에 있다가 지난 1일자로 당진시남부노인복지관장직을 맡게 됐다.박 관장은 “남부노인복지관에 와서 어르신들이 참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또 어르신들이 복지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면 성열이 학생은 친구 따라 ‘붓’을 잡았다. 열이 학생이 잡은 붓은 꿈을 그리며 그가 걸어 나가야 할 길을 만들어 냈다. 이제는 꿈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 서예를 알리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열이 학생의 길을 담았다.6학년 때 쏟아진 ‘금’빛초등학교 5학년, 열이 학생이 12살이었을 때 친구 따라 서예를 배울 수 있는 상록묵향회에 발을 들였다. 붓을 잡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열이 학생은 당시 상록문화제에서 동상을 입상했고 점점 실력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1년도 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