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는 지금처럼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때문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거나 수레에다가 예쁜 배경을 만들어 싣고 다니는 이동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부족함 없이 자란 나는 또래들 보다 어릴 때 찍은 사진이 많은 편이다. 옛날에 찍은 사진을 많이 보관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인화하지 않고 스마트폰에 사진을 저장해 두고 다닌다.한편 나는 지난해 6월부터 채운동에 위치한 코아루아파트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다. 안양에 살 적에도 아파트 동대표, 새마을부녀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가장 중요
사는 것 자체가 즐겁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가정도 평안하고 모든 것이 좋다. 나는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아버지 고향인 당진으로 피난왔다. 그리곤 15살 때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인천으로 떠났고, 18세 때 다시 당진을 찾았다. 스무살 쯤 상경해 모터 전문기술 관련 직종에서 근무했다.현재 나는 육성전기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작은 규모이지만 농사도 짓고 있다. 앞으로 건강을 지키면서 재밌게 사는 것이 내 꿈이다. 올해로 채운9통 통장을 맡은 지 5년차가 됐다. 채운9통은 화합이 잘 된다. 앞으로도 주민
나는 태안읍 남면 출신이다. 현재는 서산에 살고 있으며 서산시 석남동 주민자치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당진군청에서 정년퇴직을 했으며 34년 간 공직생활 중 17년을 당진군청에서 근무했다. 당진은 내게 제2의 고향이다. 고향인 태안보다, 현재 살고 있는 서산보다, 당진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다. 또한 당진에 대한 애정도 깊다. 그래서 모아놓은 사진을 보면 거의 다 당진에서 당진사람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 찍히는 것 둘 다 좋아한다.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어서 당진사진동우회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옛사진을
나는 고대면 성산1리에서 나고 자랐지만, 행정구역상 학교는 석문국민학교(석문초등학교)를 졸업했다.초등학교 3학년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군복을 입고 총을 멘 인민군들이 학생들에게 북한 노래를 부르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엔 비행기만 봐도 무서워서 숨곤 했다. 또 가난한 시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점심식사를 굶었던 일 등 어릴 적 일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나는 9남매 중 장남이다. 위로 누님이 여섯이다. 아버지가 50세 넘어서 나를 낳으셨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환갑을 넘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나는 초락도에서 태어났다. 초락도는 현재 석문면 초락1리로 섬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섬이었다.당시 초락도에서 당진 시내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나가야 했다. 초락도 주민들은 봄엔 보릿쌀 한 말, 가을엔 벼 한 말을 사공에게 줬고, 사공 덕에 우리는 당진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썰물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 당진으로 나갔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기에 건너편을 바라보고 소리를 질러 안부를 묻곤 했다. 1960년대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섬이 아닌 육지가 됐다.섬이었을 때 사진을 찍어놨으면 초락도의 역사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
경기도 양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30년 전 당진을 찾았다. 전혀 연고가 없었지만, 지인의 소개로 당진을 알게 돼 당진에 터를 잡은 것이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는 자연스레 시와 수필을 쓰게 됐다. 현재는 연호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 것 같다. 사진 속 친구들과 연락이 끊겨 아쉽다. 첫 번째 사진은 중학생 시절 동창들과 찍은 사진이다. 경기도 양주 광적중학교에 다닐 때 이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놀러
송악읍 정곡리 출신의 나는 송악초를 졸업한 뒤 상경했다. 이후 22세에 당진에 내려와 송악읍 가교리 출신의 7살 연상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당시 시아버지가 가교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셔서, 지금까지 남편과 나는 가교정미소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옛날 사진을 보면 결혼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많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사진이 없었으면 지난 과거의 추억을 그냥 흘려보냈을 것이다. 난 기억력이 좋아 사진을 보면 언제 찍은 사진인지, 누구랑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 번째
·전라도 광주 출신·세한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사)한국실용음악학회 회장·CSI퓨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대한민국 ROTC 합창단 상임지휘자·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 상임지휘자 나는 세한대학교에서 20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기 전에는 10년 간 전라도 광주에 위치한 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전라도 영암군에 위치한 대불대(현 세한대)에서 1년 간 교양과목을 담당하다, 음악학과가 개설돼 학과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이어 세한대실용음악과가 2003년에 만들어져, 실용음악학부장 겸 6개 학과 소속 예술계열 책임교수를 맡았다.세
나는 고대면 당진포2리에서 나고 자랐다. 젊은시절 도시가 궁금했던 나는 인천에서 6년 간 타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결혼할 쯤 다시 고향인 당진으로 내려와 아내를 만났다.현재 나는 당진포2리 이장을 맡고 있으며 벼와 고구마를 비롯한 농사를 짓고 있다. 결혼했을 때 찍은 흑백사진 등 옛날 사진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된 사진들이라서 찾기 어려워 아쉽다. 첫 번째 사진은 삽교천 방조제가 준공된 이후 당진포2리 동네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삽교천으로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왼쪽에서 세 번째 오토바이를 타고
여러분은 11월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나요? 친구들과 서로 주고받는 긴 막대과자의 날? 그날 말고도 11월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궁이었던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버린 아픈 역사의 이야기, 우주로 날아간 유기견 라이카의 이야기, 학생의 날에 얽힌 이야기 등 매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린이기자단과 함께 11월로 출발해 볼까요?품앗이학교 어린이기자단학생의 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일제식민지, 독립을 외치는 곳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고대면 당진포2리에서 태어나, 고산초를 졸업한 후 인천으로 올라갔다. 중·고등학생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나는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만약 내가 육상으로 대학을 진학했다면, 아마 체육교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젊은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2년간 근무를 했다. 주로 경기지역을 다니면서 주민 의료봉사, 반공교육, 홍보활동 등을 맡았다.나는 낙천적이고 유머있었고, 음악을 참 좋아했다. 특히 쎄시봉을 좋아했다. 서울에서 쎄시봉이 노래한다고 하면, 직접 보러가곤 했다.나는 사진이 참 많다. 사진은 사람이 살
나는 우강면 송산1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35년 동안 우강에 위치한 대전전파관리소 당진사무소에서 청원경찰로 근무했다. 퇴직 후 나는 송산1리 노인회 총무로 3년 째 활동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군인이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군대생활이 좋았다. 규칙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와 잘 맞았다. 옛날엔 과거 사진만 보면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감성이 많이 무뎌졌는지 덤덤하다. 첫 번째 사진은 1970년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나는 군수물자 지원부대에 소속돼 있었다. 22세
난 순성면 성북2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당진 토박이다. 이름이 ‘칠성’인 덕에 어린시절 칠성 사이다라며 놀림도 많이 받았다. 내 이름은 내가 7월 7일에 태어났고, ‘성’이 돌림인 탓에 할머니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다.나는 어린시절에 찍은 사진을 전부 갖고 있다. 사진을 정리하는 일이 취미여서 옛날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 옛날에는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오히려 요즘엔 사진을 찍지 않는다. 현재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 세월의 흐름이 몸소 느껴진다.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생 2학년 때 큰 누나와, 친하게 지냈던 이웃누나와 찍은
나는 고대면 성산1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당진 토박이다.21세 꽃다운 나이에 동갑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벌써 결혼한 지 벌써 58년이 됐다. 아내는 나를 처음 봣을 때 어린아이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인·장모님을 처음 찾아뵀을 때 야무지게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보고 똑똑하다고 느꼈단다. 나는 가끔 고이 넣어 둔 젊은 시절의 사진을 꺼내 본다. 옛 사진을 볼 때마다 세월이 훌쩍 흘러갔음을 느낀다. 첫 번째 사진은 20대 중반 무렵에 찍은 사진이다. 이때만 해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주름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나는 고대면 슬항1리에서 나고 자란 당진 토박이다. 지난해부터 나는 고대면농업인단체협의회장 맡고 있으며 동시에 풍원농장을 운영하고 있다.집에는 사진앨범이 굉장히 많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는 인화를 하지 않은 채로 스마트폰 앨범에 사진을 담아두지만 옛날에는 필름사진을 인화해 사진첩에 넣어뒀다. 이전 사진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 그립기도 하고 ‘더 잘살 걸’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앞으로는 즐기며 살고 싶다. 젊은 날 바쁘게 살았으니 남은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호서중학교 1학년 재학 당시 찍은
옛날부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오늘처럼 내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이 있었다면 메모라도 해놓을 걸 그랬다. 옛 사진을 보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할 때도 많다. 특히 학창시절 친구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 전 사진을 꺼내보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1970년부터 마을 일을 보기 시작했다. 고대면 장항리 새마을지도자, 이장으로 활동했다. 올해 75세가 된 나는 마을일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지역민들과 친목모임에 참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절친했던 친구와
당진 읍내에서 태어난 나는 당진성당 부설 소화유치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마치고,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자 1984년에 고향인 당진을 찾았다. 이후 1996년부터 약 20년 동안 롯데리아 당진점을 운영했고, 현재는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 여행하는 맛에 푹 빠져있다. 이번 달에도 아내와 함께 북유럽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갖고 있는 사진 중 여행 사진이 대부분이다. 옛 사진을 보면 다시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한다. 행복은 상대방과 비교한다던지,
나는 읍내동에 위치한 ‘입는 기쁨’ 여성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19년 전, 주말마다 고모가 운영하던 입는기쁨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을 계기로, 입는 기쁨을 인계 받아 운영해오고 있다.현재 세 남매를 키우면서 매장까지 운영하느라 바쁘지만, 자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배웠던 문인화, 서예, 미술, 댄스스포츠, 난타 등은 어느 순간 나의 취미가 됐고, 바쁜 시간을 활용해 작품전에도 참여하고 있다.큰딸인 지유가 합창, 벨리댄스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그 순간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많이 촬영해 놓
그동안 찍어둔 옛 사진을 보면 감개무량하다. 어떤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사진을 많이 갖고 있진 않지만 다시 보면 그 당시의 추억이 떠오르기에 남은 사진들은 잘 보관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아들들과 찍은 사진이다. 정미면 대조리 출신인 나와 대호지면 장정리 출신의 한 살 연하 남편과는 중매로 만나, 20세 때 결혼했다. 이후 4명의 아들을 낳았고, 남편은 내 나이 28살 때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고난 뒤 아들들과 천의장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눈물 흘
내 사진은 물론이고 자녀들 사진도 참 많다. 가족들과 함께한 사진부터 43년 6개월 동안 교직생활할 때 찍은 사진 등 다양하다. 사진이 많아 정리하다 버린 사진도 많다. 사진을 들여다 보니 그 당시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첫 번째 사진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3학년 재학시절, 1년 후배들과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는 양호실 부장, 교열부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학생들의 옷차림새 등을 관리하는 선도부 활동도 했다. 이 사진은 그 때 함께 학생들을 선도했던 후배들과 찍은 사진이다. 60년이 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