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가정만들기운동본부 고영석 본부장은 고대면 항곡리에서 태어난 당진 토박이다. 그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취지로 설립된 행복한가정만들기운동본부(이하 본부)를 운영하고 있다. 본부에서는 노인과 청소년에게 사랑의 찐빵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고 본부장은 “지금처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이라며 “시민들이 어려운 이웃에 대해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현재 당진에 일자리가 많이 부족한 상태에요. 당진시는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당진시건강가정지원센터 가족역량강화지원사업팀에 근무하고 있는 이중문 씨는 당진지역의 취약가족과 위기가족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대상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다가 최근 사업 운영을 재개하게 돼 설렘을 가득안고 일하고 있다. 이 씨는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대상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유선상으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이 씨는 학창시절 현실을 도피하고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어온 독서생활은 지금까지 이 씨의 오래된 취미생활이다.
공무원 퇴직 후 당진시 노인회장으로 활동여성부회장 제도 도입 및 경로당 활성화 보람 첫 번째 사진은 지난 2013년 노인회 회원들과 함께 중국 북경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방문하기 전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해서 배경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북경에서 태극기를 만나니 가슴이 벅찼다. 과거 사진을 찾아보니 예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사진을 많이 찍어 놓지 않아 아쉽다. 과거에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송악면장으로 퇴임했다. 이후 대한노인회 당진시지회 취업지원센터장으로 7년 간 활동하다 지난 2010년부터
이정애 사랑샘미술심리상담센터장에게 당진시대는 반가운 소식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진시대를 접했다는 그는 “내 주변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지역신문을 봐야 한다”며 지역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진시대 SNS를 통해서도 기사를 읽으며 이를 캡처해 주위에 전하기도 한단다.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센터로 신문이 배달된다. 그는 센터에 당진시대를 비치해 센터를 방문한 사람들도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센터장은 “학부모 등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신문을 읽곤 한다”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코너와 기삿거리가 많이
대동다숲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초록나무미술교습소는 지난 2016년에 문 열었다. 다년간 미술 교습소, 학원, 어린이집을 운영했던 송명희 원장은 “이전에는 유아부터 초등생, 중고등학생도 가르쳤다”면서 “현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하고 있다”고 말했다.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해오면서 송 원장은 상담을 잘하는 선생님으로 소문났다. 무엇보다 그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면 아이들의 마음에서 생각하려고 한다고. 송 원장은 “평소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집중했다”며 “아이들이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상담 선생님이라 할 정도였다
합덕읍 구양도는 당진과 예산군 신암면의 시·군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현재 30여 가구 7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구양도리 이장을 맡고 있는 현자섭 원장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싶단다. 현 원장은 “주변에 삽교천이 흘러 아침·저녁이면 노을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이를 살려 마을을 활성화하고 싶다”고 강조했다.하천길에 이야기를 입히고, 마을회관을 게스트하우스처럼 꾸며 수익 창출을 꾀하는 등 활기찬 마을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올 연말에는 마을회관에서 된장·청국장 등 장 담그기 활동을 할 계획이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당진으로 이주했다. 당시 외가가 면천이었던 할아버지는 지주를 대신해 소작 관리를 맡았다.아내(전선옥)를 만나 결혼하고 8남매(3남 5녀)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평생 농사일을 하면서 지역에 봉사하고자 했다. 1960년대에 이장으로 선출돼 마을 일을 돌봤고, 농촌지도소 면천면 지도사, 새마을지도자 면천면협의회장 등으로 활동했다.그리고 자개2리 노인회장도 맡았다. 옛 사진을 꺼내보니 새삼 ‘아, 이런 일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던 박평화 바르게살기운동 당진시협의회장은 젊은 시절 인천의 도매상 직원으로 일하다 23살의 나이로 당진에 돌아왔다. 운수업을 하며 가정을 꾸렸던 그는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전기사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원했다고. 이후 당진교육지원청과 서산교육지원청에서 교육장이 타고 다니는 관용차를 운전하게 됐다고.당진감리교회 교인이기도 한 박 회장은 운전기사를 그만둔 뒤 교회에서 복지사업으로 지난 2000년에 만들어진 사회복지법인 평안마을 설립을 도왔다. 그는 “구룡동에 평안마을을 짓고 인근 지역 노인요양시설에 있던 노인들
지난 한 해 동안 14명의 당진시민들이 당진시대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소개했다.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부터 최근에 읽은 요즘 시대상을 반영한 책까지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여러 책이 지면에 소개됐다. 이 가운데 꼭 읽어봐야할 책 6권을 선정해 소개한다. 박종육 좋은이웃노인전문요양원 원장 추천이스라엘 출신 유발 하라리가 쓴 는 인류의 기원을 통해 현재를 설명하고, 지금의 인류가 어떠한 미래를 열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로 다른 종들
사진을 찾으면서 젊은 시절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맨 모습이 촌스러워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절에 대한 향수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 늦은 나이에 03학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다양한 자격증 취득에 도전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해냈을 거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 양재학원 다니던 시절1966년 천의양재학원을 다닐 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시 정미초등학교 옆에 천의양재학원이 위치해 있었다. 제일 뒷줄 왼쪽에서
“송악읍에서 송악산은 자랑입니다. 송악읍주민자치회 마크에도 송악산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들어가 있죠. 지역의 상징인 송악산에 철탑이 건설돼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4대째 송악읍 중흥리에서 살고 있다는 최창규 송악읍주민자치회장은 당진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 20~30대를 보냈다. 지난 1991년 33살이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송악읍 중흥리에서 10여 년간 중흥건재를 운영했다. 당시엔 꽤 크게 건재상을 운영했지만 한보철강 부도 사태를 맞으며 타격을 입기도 했다고.최 회장은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정덕순 한국농어촌공사 노동조합 당진지부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봉사’와 ‘소외된 이웃’이다. 올해로 당진송악로타리클럽 활동 21년 차, 송악사랑회 활동 6년 차를 맞은 정 지부장은 “봉사를 하면서 독거노인, 차상위계층, 결혼이주여성, 북한이탈주민 등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많이 만났다”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전했다.그는 자신이 속한 당진송악로타리클럽과 한국농어촌공사 당진지사를 연계해 송악읍 봉교리에서 사랑의 집수리 봉사를 실시했다. 또한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과 후원을 이어가고
“24년 전 안산에서 당진을 가려면 버스를 3~4번 갈아타야 했죠. 그 당시 당진은 버스가 다니는 길인데도 흙길이었어요. 길 옆으로는 풀이 자랐죠. 재밌던 것은 사투리였어요. 아이들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골 어르신들의 사투리가 너무 재밌었죠.”먹그림사랑회에 활동 중인 진미경 총무는 지난 1996년 남편의 직장으로 인해 아무런 연고 없는 당진에 왔다. 처음에는 시골살이가 익숙치 않아 적응이 어려워 당진을 떠나고 싶었지만 사람들을 사귀고 인연을 맺어가면서 이제는 떠날 수 없는 곳이 됐단다.당진이 제2의 고향이
박영래 송악읍체육회장에게 있어 이제 당진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1982년 27살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온 그는 34년간 송악고 교단에 섰다. 박 회장은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갈까 고민했는데 당진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만큼 쌓인 인연과 정이 깊었다”고 말했다. 이어 “교직을 퇴직할 때 수많은 제자들이 설악가든에서 은퇴식을 마련해주기도 했다”면서 “제자들의 마음이 고마웠고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났다”고 덧붙였다.현재 박 회장은 대학교에서 체육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부터는 송악읍체육회장 직을 맡고 있다. 박 회
당진을 상징하는 ‘학’을 따서 이름 붙인 학동인회가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는다.당진의 첫 미술단체인 학동인회 창립멤버인 이경숙 작가는 “학동인회가 창립된지 어느덧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면서 “오늘날처럼 당진의 미술이 발전하고 활성화된 데에는 학동인회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충북 영동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이 화가는 시골에 대한 동경으로 합덕읍에 내려왔다. 상명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해 지난 1975년 서야중학교 미술교사로 교단에 선 그는 지난 2005년을 끝으로 28년 간의 교직
아버지와 딸과 아들이 함께 책을 읽는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책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놀며 자랐다. 아버지가 독서를 강요하진 않았지만 늘 책을 가까이 하며 지냈기 때문에 자녀들 또한 독서는 일상이었다. 오랫동안 길들어진 습관은 어른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책을 읽고 가족들과 대화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자연스럽게 삶에 물들었다.우강면주민자치회장인 문수일(67) 씨와 딸 문한나(38) 씨, 그리고 아들 문지훈(33) 씨가 함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대통령기 제40회 국민독서경진대회 우수상 수상했다. 당진시 예선부
코로나19가 우리 사회를 잠식하며 일상을 뒤바꿔놓았다. 그 중 스포츠 활동도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동안 당진시장애인체육회는 좌식배구, 배드민턴, 볼링, 당구, 탁구,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코로나19로 사업과 활동이 어려워졌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이상훈 당진시장애인체육회 사무국장은 “사람간 접촉을 피해야 하다 보니 체육 활동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자체적으로 운동 방법을 영상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비대면 화상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현재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아지면서 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적십자 활동에 뛰어들었다. 평생을 봉사해야 할 자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던 건 늘 이웃과 더불어 사셨던 친정어머니를 많이 닮은 탓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 힘과 시간을 나눴지만 얻은 보람이 더 크다. 그래서 혹자는 “봉사자는 남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던 걸까. 1. 이웃도 나도 모두 한 몸첫 번째 사진은 1978년도 삽교호에 자연환경 캠페인을 하러 나갔을 때다. 적십자의 전신인 ‘부녀봉사대’는 여성으로만 조직된 단체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노란 적
기지시줄다리기에는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 나라의 평안과 안녕,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500년 전부터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한진 앞바다에 큰 해일이 닥쳐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을 때, 이 지역을 지나던 한 학자가 제사를 지내고 줄을 당기면 재앙을 이겨낼 수 있다고 제언하면서 주민들이 줄을 다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그 유래가 알려져 있다.주민들은 이후 매 윤년마다 물아래(수하) 지역과 물위(수상) 지역 주민이 둘로 나뉘어 줄을 당기며 재앙을 극복해왔다고. 김덕주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위원장은 “기지시줄다리기를
서예는 사상과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서예(書藝)라는 단어는 해방 이후 서예가 손재형 선생에 의해 시작됐다. 조선시대까지 ‘서(書)’로 불리던 이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방식대로 ‘서도(書道)’라 불렸는데, 일본의 잔재를 지워버리자는 의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서예’라는 단어가 일반화된 것이다.당진시서예협회는 지난 1989년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발족한지 올해로 31년차를 맞는다. 故 홍락표 전 회장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 한상현 씨가 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한 회장은 “당진군이었던 당시 각 읍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