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을 기르고 멋을 내던 10대 청년은 이제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젊은 시절 부산에 내려가 일하며 접한 헬스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노력과 인내의 열매로 건강한 육체를 가꿀 수 있다는 매력에 흠뻑 취해 헬스에 몸 담았고 불과 40kg 후반대의 호리호리한 몸에서 근육으로 다져진 80kg의 몸을 만들기까지 열심히 땀흘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18세 또는 19세 당시에 찍은 증명사진으로 기억한다. 부산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장발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
35세부터 45세까지는 인생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기다. 그만큼 활동적이며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시기다. 하지만 목표로 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달리다 보면 어느덧 뒤를 돌아볼 때가 돌아오게 된다. 그 시기가 지금 나에게 찾아왔다.아무리 만족스러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사람이라도 “조금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어차피 남을 아쉬움이긴 하지만 노력하고 도전하는게 인생이다. 첫 번째 사진은 1984년도에 합덕JC 창립 기념행사를 치르고 대전·충남 롬 회장들과 솔뫼성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서산 출신으로 정미면 수당리 출신인 남편(정재능)을 만나 당진에 오게 됐다. 당진시청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퇴직 후, 우리 부부는 남편의 고향 수당리에 내려와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이후 남편은 수당리 이장을, 나는 부녀회장을 맡아 마을을 이끌고 있다. 10년 전 폭우로 집이 물에 잠기면서 사진과 살림살이가 다 떠내려가 사진이 없는 줄 알았는데, 꽤 많이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사진을 보면서 웃음을 지을 수 있어 좋았다. 첫 번째 사진은 1976년 2월, 나와 남편이 약혼식을 할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는 25살, 남편은 29
당진에는 53개 단지의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동주택단지는 그만큼 철저한 관리와 주택법에 따른 각종 행정이 이뤄져야 한다. 그 역할을 당진시에 있는 53명의 관리소장들이 전담하고 있다. 나는 안전관리에서부터 시설물관리까지 입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활동하는 주택관리사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호서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찍은 사진이다. 나는 13회 졸업생으로 뒤에서 두번째 줄 왼쪽 두번째에 서 있다.고대면이 고향인 나는 고대초등학교를 졸업해 호서중·고를 거쳐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40여년 간 담배 애호가로 살아왔던 나는 5년 전 금연을 시작했다. 담배를 오랫동안 펴왔기에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애연가들에게 금연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젊은이들이 담배 피는 것을 볼 때 훈계를 하곤 하는데 잘 듣지 않으려고 해서 안타깝다.당진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환경오염이 심해지
지난 1988년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던 용왕횟집을 물려받아 지금은 내가 운영하고 있다. 횟집이 처음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당시 장고항에서 유일한 횟집이 바로 우리집이었다. 장고항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인근에 횟집이 하나 둘씩 개업했고, 어머니가 주민들에게 회 뜨는 법을 알려주시곤 했다. 서로 서로 도우며 지냈기에 장고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들과 노적봉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맨 왼쪽에 서있고 그 옆에 동생(송현수), 어머니(김기순), 아버지(송대석)가 계신다. 그 뒤로 보이는 곳이 갯
나는 서산 출신으로 남편(이호영)을 만나면서 송산면으로 오게 됐다. 나는 민화를 좋아해 민화협회에 가입해 활동을 하기도 하고 집 마당에 화실을 마련해 작품 활동도 하고 있다. 민화는 천(광목)에 염색기법을 이용해 민화를 그리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얼마전 인사동에서 전시를 위해 작품을 그리다 손에 마비가 오기도 했다. 그래도 힘들지 않은 이유는 그림 그리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인 것 같다. 서산, 서울, 당진 등으로 이사를 많이 다녀서 사진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진 찍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남아있는
사진이란건 찍을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는데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고 의미가 담겨 있다. 사진 한 장은 그 당시의 모든 이야기가 녹아 있는 것 같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머릿 속에서 희미해지기 때문에 나는 항상 사진 뒤에 메모와 함께 추억을 남겨 놓는다.나는 당진중학교를 거쳐 대전여고로 전학을 갔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예순이 넘은 지금도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과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어 삶이 즐겁다. 첫 번째 사진은농협에서 근무할 때 찍
나는 합덕읍 중궁원리에서 태어나 흥덕초등학교, 합덕중학교를 거쳤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창정리로 이사온 뒤 48년간 이곳에서 쭉 지내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땐 중궁원리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이제는 중궁원리보다 창정리가 더 편하다. 시간이 흘러 마냥 아기 같던 막내아들도 27살이 됐고, 막내딸도 올 9월이면 결혼식을 올린다. 그동안 내 옆에 아이들과 아내가 있어서 어려운 순간들을 잘 버텨냈다. 앞으로도 즐거운 나날들이 이어졌으면 한다. 첫 번째 사진은 막내아들(박철순)의 돌잔치에서 찍은 사진이
사진을 찾아보면서 아내와 설레던 연애를 할 때, 사회자로 이름을 날리던(?) 때 등 여러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면천에서 자라 면천초, 면천중, 인천 부천공고를 나왔다. 공고 진학 후 적성이 안 맞아 고생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가끔 공고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첫
나는 정미면 승상리 출신으로 천의초, 당진중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공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공주교대에 진학했고 학군단 활동을 통해 21살의 나이에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교사로 지내면서 도성초, 송악초, 당진초, 내도분교 등등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다. 이제 어른이 된 제자들이 나를 찾아오면 가끔 술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원당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나루문학회 회장을 맡아 문학활동에 열심히 임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979년도 당진예식장에서 결혼할 때 찍은 사진이다.
나와 남편(남상붕)은 둘 다 대호지면 사성2리 출신이다. 남편을 만나고 4남매를 낳아 기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막내아들 나이가 40세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속상했던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혹시라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결혼은 ‘꼭’ 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전엔 자식들 보는 재미에 살았다면 요즘은 손주들 보는 재미에 시간가는줄 모른다. 첫 번째 사진은 나와 남편의 약혼식 때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남편을 21살에 만나 연애를 하다 결혼했다.
나는 정미면 덕마리 출신으로 당진군청에서 33년 동안 공무원으로 재직했다. 지금은 순성농협 조합장으로 일하면서 농업인들이 농사를 편안히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진을 찾으면서 처음엔 기억나지 않던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린시절 사진들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사진기가 귀했던 때라 그런지 사진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사진은 1971년 결혼식에서 아내에게 반지를 끼워줄 때 찍은 사진이다. 결혼식 상차림이나 주변 풍경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본다면 생소할수도 있을 것 같다. 이때만 해도 결혼할 때 양복보다는 한복을 입었다
나는 송산에서 태어나 송산초, 당진중, 예산농고를 졸업했다. 이후 서산과 당진에서 약 30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공무원 재직 당시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부서에서 일하며 1년에 200가구 이상의 초가집을 현대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현재는 송산노인회 분회장과 당진문화원 이사를 맡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지만 바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젊게 사는 비결인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제3회 심훈상록문화제에서 상록수상을 수상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제10회 상록문화제에서도 상록수상을 받아 두 번의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모
나는 약 46년간 목회활동을 했다. 지금은 목회활동을 내려놓고 어떤 생활을 해야 할 지 생각 중이다. 그동안 아내도 만났고, 다섯 남매를 낳아 길렀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이들이 모두 잘 자라줘 고마운 마음이다. 고향인 당진에서 강원도 홍천까지 많은 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사진을 보며 개척교회를 준비하며 힘들었던 과거부터 상록수교회에서 퇴임하던 순간까지 주마등 처럼 떠올랐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당진시 기독교연합회 회장을 할 때 각 종교계 회장들과 찍은 사진이다. 이날은 기독교, 불교, 천주교가 한 자리에 모인 의미
나는 송악읍 가학리서 태어난 당진 토박이로 천안에서 잠깐 지내다 다시 고향인 당진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기지초등학교 운영위원장,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준비위원회 이사와 송악읍의용소방대, 송악읍체육회 등 지역사회에서 활동 하고 있다. 또 배구 A급 심판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배구 심판으로 봉사 하기도 한다. 10년 전 사진들을 보면서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많은데 사진을 찾지 못해서 아쉽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 4월 5일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 18년 만에 결혼식을 올린 사진이다. 그동안
나는 면천에서 태어난 당진 토박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당진을 뒤로하고 1968년도에 목회활동을 위해 잠시 고향을 떠났다. 이후 15년간 목회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당진에서 노인대학강사, 봉사활동, (사)한국국악협회 당진시지부 민요분과 분과장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많은 활동을 하다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보람과 행복
나는 우강면 송산2리 아래말노인회장직을 3년째 맡고 있다. 처음 노인회장을 맡았을 때 노인회는 적자상태였는데 지금은 꽤 수입이 있는 편이다. 송산2리가 분리 되면서 4년 전에 아래말노인회가 생겼다. 오래된 노인회는 아니지만 농작물을 심어 수익을 내고 있다. 다들 작물을 함께 돌볼 만큼 마을 주민들 간 사이가 돈독하다. 올해에는 수익금으로 마을 주인들과 여행
빛바랜 사진들을 보니 세월의 무상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안섬풍어당굿에 참여해 마을의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과거 안섬풍어당굿 보존회장부터 현재 예능보유자까지의 인생은 내 인생의 자부심이고 자랑거리다. 앞으로도 우리 전통인 안섬풍어당굿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아내(구병회)와 함께 제주도로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우리부부는 마을에서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뒷집에서 싸우는 소리 한 번 들리지 않는다며 신기해 할 정도다. 아내는 23살에 시집와 24살에 첫째를 낳았다. 지금
나는 대호지면 마중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먼 곳인 서울에서 MC 생활을 하면서 후회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MC를 하면서 방주연, 이은하, 유지나, 나훈아 등 많은 연예인을 만났다. 서울에서 MC를 하다 당진으로 내려온지 14년이 지났다. 그동안 당진에서 ‘윤이벤트’를 운영하며 많은 행사진행을 도맡았다. 앞으로도 즐거운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첫 번째 사진은 군복무 시절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나는 경기도 교문리에서 군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