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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러 백발에 아미산 왔습니다 - 한국민중미술의 대부 김경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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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효성여대 교수시절, 서구미술과 모더니즘의 벽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던 한국 미술계에 <예술은 그 시대의 자식이어야 한다 designtimesp=15263>고 처음 현실참여적인 화두를 던진 김경인 화백. 소나무에서 한국적인 것의 정체성을 찾아온 그가 ‘이제는 정말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향 아미산에 왔다.




백발이 된 노 교수님. 김경인(60세) 화백이 아미산 자락에 작업터를 마련했다. 일찍이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한국미술계에 민족민중예술이라는 새 계보를 이루었던 김화백은 이제 고향인 당진에 돌아와 지나온 긴 여정 위에 남은 날들을 풀어놓을 생각이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이틀 인하대에서 강의를 하는 것을 빼고는 내내 이곳에서 기거할 예정으로 있다.
우리와 같이 인생경험이 부족한 필부들의 생각에는 이제 말년을 좀 편히 지내시려나 보다 하지만 정작 이분께는 낙향 또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일 따름이다.
“그림을 제대로 해봐야지. 이제야 그림이 뭔지 좀 알겠거든. 그동안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사회적인 일도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진짜 작업다운 작업을 해봐야지 않겠어?”
김 화백은 이제야 자기소명의 중심부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바깥 환경만이 아니라 자기 안의 목소리도 그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떠나라. 나룻배를 타고 물을 건넜으면 이제 나룻배를 버리고 걸어라.
“그러자니 시간이 필요했지. 아무래도 도시에 있으면 내 움직임이 내맘 같이 되지가 않거든. 그래, 시간이 필요해.”
김 화백이 고향에 있는 아미산으로 오게 된 것은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소중한 것은 마음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시간을 내기를 기다린다. 김 화백에게는 그림이 그것이다.
“그리고 화가에게는 공간이 제일 중요해. 작가야 원고지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화가는 그렇지가 않잖아?”
마침 공간도 필요했던 김 화백에게 아미산은 공간 이상이었다. 그곳이 고향이어서만은 아니다. 아미산이 오지이기 때문이다. 사람 발길이 쉬 닿지 않는 곳. 사람의 손때가 아직 묻지 않은 곳. 이쪽에서는 저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지만 그쪽에서는 이쪽을 쉽게 볼 수 없는 곳. 그래서 김 화백은 처음부터 이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더구나 이곳에 지어진 작업실은 빈한한 김화백의 사정을 잘 아는 후배 한사람이 제집 짓듯이 헌신적으로 지어준 곳이다.
“사실은 이곳에 오려고 벼른 지가 10년이 넘었어. 그때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땅을 좀 사놓고는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지. 이제야 때가 된 거야.”
돌아보면 긴 세월,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현실의 타락을 비판하는 그림그리기와 리얼리즘적 표현주의라는 이론적 틀을 구성하는 데에 시간을 쏟아왔다.
한국적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가장한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2년, 국내미술계가 국전과 서구미술이라는 획일적인 흐름을 타고 있을 때 선생은 논문 <한국적인 이미지네이션 designtimesp=15279>을 발표하면서 처음 현실참여적인 발언을 미술계에 던진다.
“논문의 요지는 이런 거야. 그동안 한국적인 것의 대명사처럼 불려온 한복이나 초가집은 분명히 한국적인 것이긴 하지만 우리시대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시대의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은 그시대의 자식이어야 한다 designtimesp=15281>고 가정할 때 우리의 그림에는 풍경만 있지 삶은 없다. 불과 1910-20년에 도입된 서양화가 우리의 삶을 덮어버리고 우리의 현실이 가장 비참할 때조차도 우리의 그림은 현실을 외면했다. 뭐 이런 거였지.”
당시 효성여대 강단에 서고 있었던 선생은 이 논문의 발표와 때를 같이해 자신의 주장을 근거로 종전의 그림양식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화풍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른바 리얼리즘이었다.
“그림은 장식이기도 하지만 장식만은 아니거든. 그림은 심미적 아름다움, 그리고 메시지로서도 존재한다는 말이지.”
이렇게 한국 근현대 미술계에서 최초로 리얼리즘적 표현주의를 표방했던 선생은 70년대에 홀로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 그를 위한 논리적, 현실적 토대를 마련해 나갔다. 선생은 젊은 작가군 임옥상, 민정기 등과 <제3그룹 designtimesp=15285>을 결성, 현실의 야만성을 풍자한 그림 ‘문맹자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의 그림들은 기관에 압수당해 없거나 전혀 상업적인 요소를 띠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점도 팔리지 않은 채 보관되어 있다.
1979년, 김동리-염무웅씨로부터 시작된 문학계의 참여-순수논쟁이 뜨겁던 때였다. 그때에도 미술계의 높은 모더니즘의 벽은 이 논쟁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때 미술계에 처음 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선생이 몸담고 있던 제3그룹이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오광수-오경환-김경인에 이르는 3탄에서 끝이 났다. 더이상 아무도 논박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순수를 부르짖은 사람들의 국제성이란 것은 사실 억지였어.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지. 그때부터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야.”
이때 시작된 선생의 참여적 활동은 지난 1998년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대표를 지낼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그 사이에 선생의 그림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만한 사람은 알 테지만 최근 선생의 별칭은 ‘소나무화가’다. 꽤 오랫동안 선생은 소나무에 천착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소재가 소나무로 옮겨갔을 뿐 선생이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한국적인 것의 정체성이다. “현실비판적인 그림을 그릴 때에도 그것은 한국성을 추적하는 과정이었어. 한국인의 심성, 도대체 한국적인 것이 뭐냐, 세계미술사에 있어서 한국의 정체성은 뭐냐 하는 과제였지. 결과적으로 내가 도달한 지점은 한국적인 것의 조형적인 기본원리가 소나무에 담겨있다는 것이었어.
이것은 하나의 가설이지만 한국적인 조형의 모든 것이 소나무에서 출발해. 고려시대의 자기, 조선시대의 한복, 이런 것들이 지니고 있는 ‘선’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살았던 소나무가 있는 거야. 선, 에너지, 조형성, 그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말이야.“
소나무에 대한, 아니 한국적인 것에 대한 끈질긴 추적은 단체활동을 모두 정리한 지금도 비예술단체인 <숲과문화연구회 designtimesp=15292> 회원으로 머물게 하는 이유다. 선생은 ‘소나무에 대한 조형적 접근’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산림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소나무에 대한 특강을 하기까지 했다. 현재 선생은 박희진, 김영무 시인등 4명의 예술인과 함께 <숲과문화 designtimesp=15293> 명예운영위원으로 있다.
2001년. 선생은 고향 당진, 그것도 아미산이라는 곳에 머물게 된 사실을 무척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 당진을 걱정하는 마음도 크다.
“읍내에 나가보면 소비성향이 강하고 퇴폐적이고 물질적인 흐름이 주류라는 걸 금방 느낄 수가 있어. 이렇게 갈수록 상대적으로 취약해 지는 게 문화지. 문화가 밥먹여주느냐는 목소리도 있을 것이고. 아니, 있을 수밖에 없어. 19세기초 실증주의로부터 시작해서 예술무용론을 주장하는 계보는 늘 있어왔으니까. 난 그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문화라는 것을, 눈앞의 것만 가지고 보면 안되지.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과 국제산업기술 경쟁을 해도 거기엔 디자인이 필수야. 디자인은 어디서 나와? 디자인은 바로 예술적 토양에서만 나올 수 있어. 그런데도 아직 우리의 정책을 보면 문화에 대한 의식이 너무 낮아.“
이 대목에서 선생은 박완서의 소설 <모독 designtimesp=15298>을 얘기한다
“중국인들의 티벳사람에 대한 모독을 소설화 한 건데 티벳사람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비우고 살거든. 필요한 만큼 얻어서 남는 것은 다 나눠주고 다시 필요한 것을 얻곤 하지. 하지만 중국인들의 소위 문명이라는 것은 그들을 모독하고 멸시해. 그 모독은 인간에 대한 모독, 인간성에 대한 모독, 문화에 대한 모독, 영혼에 대한 모독,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모독이야.”

“계획? 뭘 그려야겠다는 계획은 없어. 그럼 또 얽매이잖아. 거기서 자유로와 져야지.”
“그림을 왜 할 것 같은가? 화가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는 건 영혼의 자유로움이야. 흔한 말로 그림이 밥먹여 주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날 그날의 양식 뿐이지 않은가? 그림을 통해 하는 일은 일종의 신앙 같은 거야. 영적으로 도달점을 향해 가는 일이지. 어떤 목적도 없고. 그저 자기를 풀어 가는, 그러면서 결국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도전인 거지. 자기영혼의 해방을 향해서 말이야.”
“현실적인 것에서 뭐가 성취되겠어? 수도승들의 면벽 참선 10년. 그런 거 참 아름답지 않은가? 세속에 살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겠지만 티벳에 가서 보면 그런 삶이 안보이는 것도 아니야.”
지나온 긴 여정의 행랑을 단촐하게 꾸려 아미산 산골에 온 노 화백. 거기서 다시 기약없는 여정에 나선 한 시대의 선각자가 생각하는 삶은, 그림은 이런 것이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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