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18 13:58 (목)

본문영역

  • 사회
  • 입력 1995.01.16 00:00

제1회 전국중중장애인 배우자 초청대회 특별상 수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앉은뱅이 꽃은 걷고 싶다”

* 「박 광 옥씨의 수기」 공개
* 박 광 옥(우강면 내경리)
* 끝없는 암선고로 생명은 단련되고

그의 나이 서른살, 나는 서울 D병원 간호사였다. 의사선생님을 따라 그의 집에 다니면서부터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스물 아홉 왕성한 혈기로 삽자루 하나 둘러메고 서독에 광부로 취업했다가 교통사고로 1급 1호의 장애인이 된 그는 누구보다 쾌활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매사에 호탕하고 주관이 확실한 그와 마주앉아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왕진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늘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좀 더 가까이 그를 보살피고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쳐가는 생각이 아니란 걸 알았다. 쉬는 날이면 그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고 그이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내가 쉬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날마다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돌아갈 시간이 되어 일어설때면 그는 인사대신 이 말을 꼭 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근무하면서도 온종일 그의 생각만을 하게 되었다. 동그라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더욱 친숙하게 되었고 그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 만큼 나도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결코 무릎 끓을 수 없다는 내 의지를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날마다 동그라미를 그리세요”
우리는 공기좋은 산골에 내려가서 살기로 했다. 서울은 외롭고 답답하므로 서울에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그나마 서독정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힘들게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시골로 이사했다. 초라한 귀향길. 돈 벌어 금의환향 하겠노라고 큰소리치고 떠났던 그가 불구가 되어 돌아오는 길.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마을어귀에 나와 반겨주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한동안 침묵으로 서서 속울음 묻던 시부모님을 따라 그가 자란 그의 집 파란 대문앞에 섰다.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틈나는 대로 그의 친구들이 그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바둑도 두고 때론 취하도록 술도 마시면서 차츰 생기를 찾는 그가 미더워졌다. 우리는 시부모님 집 근처에 우리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날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한뼘 한뼘 높아지는 우리들의 집을 지켜보았다. 꿈에 부푼 날들이었다.
“젊고 사지멀쩡한 젊은 여자가 어떻게 여기서 살 수 있겠느냐. 남자 돈이나 챙겨가지고 도망가려는 것 아니냐”는 등 갖은 소문이 나를 괴롭혔지만 우리들의 집은 어느새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집에 솥단지 하나 걸고 아버님께서 첫날밤을 혼자 주무셨다. 새로 지은 집에 나이 드신 어른이 하룻밤 지내고 나서야 안심하고 이사를 하게 하는 마을의 풍습에 따랐다.
우리는 이사를 했다. 꽃씨도 뿌리고, 나무도 심고, 조그만 연못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면장님의 주례로 마을 사람들과 친적들이 모인 우리들의 집에서. 말리다 지치신 친정 어머님도, 형제들도, 가까운 친척들도 모두 참석해주셨다. 신랑입장이 생략된 결혼식장. 그는 나의 신랑이 되었고 당당하게 나는 그의 신부가 되었다. 키 작은 그의 곁에 서 있었지만 그는 이미 누구보다도 더 큰 키로 내 안에 우뚝 서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그날밤 그의 친구들은 북을 치고 징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도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의 여덟남매와 시부모님 모두 어깨춤을 추었다. 동네 어른들도, 부엌에서 일을 하던 아주머니들도 한데 어우러져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우리들의 소박한 사랑을 축복하는 소리없는 울음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마을은 지친듯이 잠들었는데 그이와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위로 형님 두분은 서울에 사시지만 동생들은 모두 한 마을에 살고 있어서 항상 든든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맘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그의 술버릇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런 생활속에서 그는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외출은 물론 시장가는 일도 시어머님께 부탁해야 했다. 시동생은 물론 동네 아저씨들하고 얘기하는 것 마저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동안 나는 집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이상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입덧하는 막내 동서가 미웠고, 남산처럼 배 나온 다섯째 동서가 샘났고, 부부동반해서 찾아오는 친지나 친구들이 보기 싫었다. 야릇한 질투심이 갈수록 나를 못견디게 했다.
그 무렵 하늘이 내게 아들을 보내 주셨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라고 혹 불면 꺼질듯한 그런 아들을. 생후 20일 된 몸무게가 겨우 2.5kg이였고 머리카락도 없었다. 잦은 병치레에 병원문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자랄수록 착하고 영특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곤한다. 유일한 위로와 희망인 우리아들 승종이.
지금은 열여덟살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다. 전국에서 수재만 모인다는 공주H고등학교에서 여전히 장학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 조금만 고생하시면 제가 꼭 훌륭한 사람되어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지난 어버이날 보내왔던 편지의 일부이다. 자기가 커서 돈 많이 벌면 장애인 전용목욕탕도 만들고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도 짓겠다고 한다. 장애인인 아버지를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속 깊은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여건속에서도 묵묵히 공부 잘해 온 아이. 나는 그런 우리 아들이 내후년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으로 우수한 대학에 꼭 합격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자랑스런 내 아들이자 이 사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머니의 고통을 토닥여주고 이해해주는 우리아들 승종이. 하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이는 척추환자용 차를 구입해서 볼링과 양궁을 시작했다. 한번은 TV 아침방소 시간에 볼링하는 그의 모습이 화면에 크게 나와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고 86년 대전휠체어장애인농구단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최초 성화봉송주자로 뛰었고 92년 대구시 주최 장애인체육대회때는 당진군 대표로 참가해 다리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그이는 나를 수시로 감동시키고 수시로 가슴 내려앉히는 재주를 가졌다. 그는 성치않은 몸에 세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반듯이 눕지도 못할 만큼 등뼈가 튀어나왔다. 옆으로 구부리고 잠을 자야 했고 앉아있을 때도 허리가 땅에까지 닿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어 독일대사관에 번역을 부탁해서 독일에 편지를 썼다. 요즘들어 한쪽눈도 안 보인다는 내용과 함께. 독일정부에서 답장이 왔다. 초청을 할테니 수속절차를 밟으라는 것이다. 그이는 보호자와 함께 갈것을 요청했지만 환자 본인만 오라는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공항으로 들어서던 그의 뒷모습이 그가 탑승한 비행기가 떠난 후에도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그이가 돌아왔다. 바위같이 참으며 무사히 그가 돌아온 것이다. 한쪽 눈의 시력은 영영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나마 바로 누워 편하게 잠잘 수 있는 그에게 좋은 꿈이 깃들리라 생각하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머뭇거리며 그가 내밀던 선물 하나. “너 다이아반지 구경이나 해 봤냐?” 그가 내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인 셈이다. 그이는 그이대로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정원에 꽃이 자라 아름다운 우리집을 사람들은 그림같다고 했다. 유화같은 노을이 꽃밭위에 드리우면 그이와 나는 데이트를 했다. 그의 휠체어는 전처럼 무겁지 않았고 정원의 짙푸른 나무들처럼 우리들 마음의 풍요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도 잠시일 뿐 그이를 이끌던 나에게 암선고가 내릴줄이야. 그이가 신우염검사차 세브란스에 입원했을때 평소에 소화가 잘 안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아본것인데 “위암입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를 번쩍 안아 휠체어에 태우던 내 건장한 팔뚝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나는 어찌 할것인가. 그이와 내아들은 어찌할 것인가. 하늘이여 대체 어찌할 것입니까?
입원수속을 마치고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에게 다이아반지를 건네주었다. 다시 그의 얼굴을 못볼 것 같은 마음이였기에. 아무 말 없이 수술실로 실려가는 나를 따라오던 그이. 힘들게 바퀴를 굴리면서 나를 따라오던 그이. 그를 두고 내가 이대로 쓰러져선 안된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내자리를 지켜야 한다. 7시간 걸렸다는 긴 수술을 마치고 3년만 잘 넘기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아들의 몫까지 자상하게 챙겨주시는 시어머님의 간호가 눈물겨웠다. 눈시울 적시며 정성을 다해 주시는 시어머니가 고마웠다. 퇴원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퇴원해서 어디로 가야할지 무척 망설여졌다. 친정 어머님이 춘천으로 가자고 하셨다. 편히 쉬면서 몸조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춘천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는 나에게 사촌언니들과 친척들이 조용히 타이르기 시작했다. 그 몸을 해가지고 어찌 평생환자를 돌볼 수 있겠느냐. 이제는 네 몸도 환자인데 어떻게 그런 생활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 사실 그랬다. 내가 건강해야 그를 도울 수 있고 그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갈등속에서 나는 몸보다 마음이 더 깊은 병에 빠져들고 있음을 알았다. 나의 이런 우울증을 걱정하시던 친정 어머님이 H병원 신경정신과에 데리고 갔다. 의사 선생님과 오랫동안 상담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혼을 권유하셨다. 암 환자가 어찌 불구인 남편과 살 수 있겠느냐고. 13년을 동고동락해 온 그이와 이혼을... 엄마를 기다리는 우리 아들하고도 헤어져야 한다. 그이의 얼굴과 내아들 얼굴이 번갈아 한시도 내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야한다! 그 길이 비록 고난의 가시밭길이라해도 나는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 시집갈때처럼 통곡하시던 친정 어머님. 난리난리치던 친적들을 뒤로하고 나는 두달만에 우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이의 눈은 퀭하니 들어가 있었고 승종이도 핼쓱해 있었다. 춘천에 와서 덥석 나를 데려오지 못했던 그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시어머님과 친정 어머님이 교대로 오셔서 정성을 다해주셨고 덕분에 내 몸도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빈혈이 생기기 시작한 건 위암수술 1년만의 일이다. 어지러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검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난소종양입니다” 혈액은 정상인데 반밖에 안되어 당장 수혈을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수술을 받아야하다니... 이제 겨우 입맛찾아 살아가는 나에게 또 수술을 하라니... 하늘이여 정말 어이하라 하십니까
거듭되는 수술로 주머니가 텅 빈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몇개월후 나는 돼지우리를 지어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얼마되지 않지만 농사도 지었다. 마늘도 심어 내다 팔았고 개도 여러마리 키웠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땡볕에서 김을 매고 있으면 그는 휠체어를 타고와서 말벗이 되어주었다. 피곤하다고 들어가서 누우라고 하면 막무가내 밭에서 살던 그이 얼굴도 검게 그을렸다. 어느새 위암수술 한지도 3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이상한 증세가 생겼다. 아랫배에 큰 덩어리가 잡히는 게 아닌가. 불길한 조짐을 짐작하였으나 그 무렵 시아버님께서 암으로 누워 계셨는데 2개월밖에 못 사실거라는 병원측의 얘기를 듣고 검사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그해 10월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나 때문에 우리 아버님 돌아가셨다고 내가 우리 아버님 돌아가시게 한거라고 밤 새워 울부짖던 처절한 그이의 모습에서 삶의 실체를 보았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어디쯤에서 서 있는 것일까.
삼우제를 마치고 그이는 검진을 받으러 갔다. 검사만으로도 진저리난다는 그이에게 정말 아무일 없기를 간절히 바랬었는데... “대장암 3기입니다” 앞이 캄캄했다. 고개들어 바라볼 하늘이 내겐 없었다. 반쪽만 살아있는 그이에게 이런 형벌을 주시다니. 울 기력도 없었다. 막막하기만 했다.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는 그에게 한마디 말도 못했다. 3년전에 그이가 그러했듯이 아무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 나는 아무 힘도 될 수 없었다.
“살아만 준다면, 살아만 준다면...” 초조하고 긴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밖으로 그이가 실려나왔다. 주렁주렁 온 몸에 링게르를 꽂고. “여보” 왈칵 눈물이 났다. 6개월에서 1년이 고비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 그가 누구인가. 몇번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거뜬히 살아오던 그 아닌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싱겁게 웃으며 돌아오던 그 아닌가.
이제 그는 좋아지고 있다. 창문을 열고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밝고 투명하다. 내년 봄엔 한라산 등산 가자. 나는 그가 지금처럼 큰소리치며 10년, 아니 또 10년 그 너머까지도 호탕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승종이가 대학생이 되고 예쁜 색시얻어 아들 딸 낳아 ‘할아버지’하고 안길때까지, 가끔 그 좋아하는 술도 마시고 운동도 하면서 분명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하늘이여 우리에게 그만한 시련을 주신만큼 이제는 우리 한식구 보살펴주소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거듭된 시련과 좌절로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몸처럼 그 반생 흘러온 날이 온통 아픔이라해도 나는 우리의 애환 가득실은 이 사랑의 휠체어 타고 하늘끝가지 갈 것이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