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뉴스
  • 입력 2003.10.01 00:00
  • 호수 484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유학자 구봉 송익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진읍 원당리 농업기술센터를 끼고 얼마를 더 들어가면 구봉 선생의 묘소와 그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은 해마다 구봉 선생의 기일인 음력 10월 1일과 한식날에 이 곳에서 제를 올린다.
구봉 송익필은 조선시대에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학문을 떨쳤던 성리학의 대가이다. 안씨 집안과의 악연으로 비록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구봉 선생은 이이, 성흔 등 당시 쟁쟁한 대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논했던 인물이다.
송익필 선생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깊이나 인간 됨됨이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에 뒤지지 않는다.
당진읍 원당리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송구봉 선생의 후손들이 40여 가구나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들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7가구가 남아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후손 중 송구봉 선생의 15대손인 송문석씨의 도움으로 구봉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골짜기 깊숙한 곳, 비탈진 능선에 사당과 묘지가 있었다. 늦은 오후, 해가 기울어가는 산비탈은 고즈넉 했다. 마치 구봉 선생의 의기와 품성을 흐트리지 않으려는 듯이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송악면 오곡리에 사는 또다른 후손, 송영지씨에게서 구봉 송익필 선생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봉선생은 1534년(중종 29년)에 서울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 때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당상관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13년 전, 그의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집안과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구봉 선생의 말년은 풍파가 그칠 날이 없게 된다.

안씨 집안과의 악연

송씨 집안과 안씨 집안이 대립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개혁파의 주도자들이 사형당하거나 귀양가면서 조광조를 적극 천거했던 안당은 파직되었다. 그의 세 아들들은 승승장구할 장래를 잃게 되었고,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 심정 등이 자신들마저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위에 불평을 하고 다닌 것이다.
송사련이 이 이야기를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중대한 모반 사건이라 고발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안씨 집안과 그들과 관련된 자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신사무옥이라 하는데 이를 계기로 송사련은 당상관의 벼슬을 얻게 된다.

타고난 학문적 재능

구봉 송익필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7살의 어린 나이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이후 20대 중반까지 학문에 열중했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이기설이나 의리의 이치에도 막힘이 없었던 그의 뛰어난 학문은 점차 소문이 퍼져 내노라 하는 문장가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이 때, 교유한 8명의 사람들을 ‘8인의 문장’이라고 불렀다. 이들 외에도 이이, 성흔, 정철, 이산보 등과도 사귀며 자신들의 학문을 주고받았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송익필의 높은 학문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송구봉 선생이 30대에 교유하던 이이, 정철, 이산해 등은 관직에 나가, 선생과는 자연히 멀어지는게 상례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와 교유하던 친구들이 여전히 그를 존중하며 함께 학문을 논하곤 했던 것이다. 양반도 아닐 뿐더러 부친 송사련이 한 일을 보면 따돌림을 당해도 벌써 당했어야 할 송익필이지만 그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 때문에 여전히 존중받으며 교유가 이루어졌다.

교육자의 길을 걷다

송익필은 27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심악산의 구봉 아래였다.
구봉선생은 그에게 배우고자 찾아온 유생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읽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사색을 중요시 하되 연구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강조한 때문이었다.
구봉선생은 선생에게만 의지하는 주입식 교육이 자칫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는 폐단을 생각했던 것이다.
구봉선생의 제자로는 예학의 대가로 알려진 김장생과 서성, 김유 등이 있다.

난세에 닥쳐 온 불행

절친한 친구 이이가 죽은 후, 때를 맞춰 구봉선생에게는 불행이 계속하여 찾아들었다. 안씨 집안의 노비가 되기도 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기도 하고, 아우 송한필과 함께 유배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9월에 송익필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이때 송익필의 나이 60이었다.
만년에는 정해진 주거지를 얻지 못하고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다 마침내 만년의 은신처인 당진군의 마양촌(현재 송산면 매곡리에 있는 숨은골(숨어골))에 오게 된다. 이 때의 나이가 63세이다.
이러한 험한 일을 겪으며 세상을 살았음에도 그는 누구를 탓하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

문학을 좋아하는 송익필은 유랑 중에도 어디를 가나 시를 읊었다. 묵고 떠나는 절이나 신세진 민가를 떠나면서 그는 시로 자신의 느낌과 자취를 남겼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그의 생활면모를 그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구봉 송익필 선생은 66세(1599년)의 나이로 지금의 당진읍 원당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이, 정철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문을 논했던 구봉선생은 그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에도 불구하고 기구한 운명을 살다 갔다.
만약 송익필의 운명이 순탄했다면 이이 못지않은 경세가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년에 쓴 족부족(足不足)이란 시를 통하여 그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필용 기자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