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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형님이 살아계시다니...” - 북한 조병권씨, 동생 조병균씨(송악면 영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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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병권씨 동생 조병균씨

학교 간다고 나간 뒤 의용군이 된 둘째형,
당시 국군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던 큰형,
어느 전투에선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을지 모르는
두 형 생각에 목메이는 조병균씨

“형님이 살아계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조병균(현 64세, 송악면 영천리, 사진)씨는 지난 17일 북한 적십자회가 전달해온 8·15 북측 이산가족 상봉단 명단에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형 병권(67세)씨가 포함됐다는 소식을, 예산에 사는 사촌동생으로부터 전해듣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쟁의 광기가 온 세상을 휩쓸던 1950년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 어느날 평상시와 똑같이 학교에 등교하던 작은형의 환한 얼굴을 다시 보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이야... 정말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는 못볼 줄 알았는데... 그런 형을 반세기만에 그것도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어 만나게 된다.
조씨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향인 예산군 오가면 원천리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 그리고 첫째·둘째형과 함께 단란하게 지내던 한 때를 잊지 못한다.
따뜻하고 온순한 성격에 공부도 잘하고 야구도 잘하던 둘째형 병권씨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형이었다. 전쟁이 터지던 해 당시 열 네살이었던 조씨는 예산농고에 다니던 둘째형 병권(당시 17세)씨가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선 후 어떻게 해서 의용군으로 나가게 됐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골에서 소박하게 농사를 짓던 평화로운 한 가족에게도 ‘골육상쟁’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 당시 국군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던 큰형, 그리고 인민군 의용군으로 나갔던 작은형.
어느 전투에서인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을지 모르는 첫째·둘째형 생각을 하면 조씨는 지금도 목이 메인다.
전쟁이 끝나고 첫째형은 돌아왔지만 둘째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이웃마을의 한 선배로부터 원천리 한 마을에서 의용군으로 나갔던 청년 9명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비보만 전해졌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형을 잃은 동생, 동생을 잃은 형 모두 참담한 슬픔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가족 모두는 비탄에 젖었고 전쟁으로 깊이 패인 상처를 평생 간직하며 살아야 했다.
설마 둘째형이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한 조씨는 이산가족 확인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론 북한 적십자회가 전달한 이산가족 상봉단 명단이 TV에서 방영될 때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씨는 “정말 돌아가신 줄 알았기 때문에 안식구가 TV를 통해 발표된 명단을 확인해보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며 “예산에 사는 사촌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듣고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만난다는 기쁨에 앞서 병권씨가 살아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한참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지난 96년 먼저 세상을 뜨신 첫째 형님 병운씨 생각에 복받치는 슬픔을 억눌러야 했다. “두 분 모두 살아계셔서 함께 만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병균씨는 목이 메인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떠나 경기도 안성 등에서 거주하다가 3년전 당진군 송악면 영천리에 정착한 조씨는 “상봉단 명단포함 소식이 알려진 후 각지의 친척은 물론 미국에 사시는 숙모님도 형님을 만나기 위해 곧 귀국하실 예정”이라며 감격해 했다.
조씨는 “상봉자 명단이 발표된 후 형님과 함께 의용군으로 나갔었던 분들의 가족과 친지들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연락을 하고 있다”며 “그분들도 모두 상봉의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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