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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숙(본지 편집위원)

 박쥐 한 마리가 족제비에게 붙잡혔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박쥐에게 족제비는 “나는 원래 모든 새들의 천적이다. 그러니 박쥐 너도 새인 만큼 절대 살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쥐는 “아,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새가 아니거든요. 이것 보세요. 꼬리가 달려있지 않습니까? 저는 쥐랍니다”하고 응수하자 족제비는 박쥐가 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얼마 후, 그 박쥐는 다른 족제비에게 또 잡혔다. 박쥐는 지난 번처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하지만 이번 족제비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나는 쥐란 놈은 절대로 살려보내지 않아.” 그러자 이번에는 박쥐가 “아니에요. 저는 쥐가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날개가 달려있지 않아요? 저는 새예요”하고 응수하자 족제비는 날개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이상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박쥐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약자인 박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의견과 자신의 정체성도 부정하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쓸개 빠진 야비한 박쥐라는 두 갈래의 의견으로 나뉘었다. 모두들 나름대로 근거있는 주장이라 여겨지지만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어차피 그 정도의 주장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를 들 때 눈이 번쩍 뜰 새로운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또 다른 느낌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견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일까?  이것 아니면 저것, 긍정 아니면 부정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제 3의 관점을 생각해내는 것이 그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박쥐를 왜 꼭 포유류인 쥐나, 조류인 새,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해야 할까? 조류니 포유류니 하는 것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적 생물학적 분류방법일 뿐이다. 박쥐를 꼭 그 어느 쪽 분류에 집어넣으려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몸의 색이 변하는 카멜리온을 그대로 바라보듯이 꼬리도 있고 날개도 있는 박쥐를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쥐는 조류, 포유류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제3의 범주일 수도 있다. 즉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닌 존재, 또는 쥐도 될 수 있고 새도 될 수 있는 존재, 또는 다른 또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박쥐를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3의 관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서만 바라봤기 때문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이분법적 판단을 강요하게 되고 이분법적 사고는 인류에게 역사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지금도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인해 우리 주위에서는 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득 홍세화씨의 글이 생각난다.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다. 이 세상에 자기와 아주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끔찍스럽게 여기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반기지도 않는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와같은  인간의 이중성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일 뿐이지 차별의 근거는 아니다. 예쁜 것과 안 예쁜 것, 공부 잘 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  날씬한 것과 뚱뚱한 것, 기독교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열린 마음과 시각이 전제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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