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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운 할머니와 나눈 심훈 가족' 이야기(당진읍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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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미국에, 장남은 북한에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

역사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어떤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의
일생도 비껴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재주있는 양가집 자손, 뼈아픈 이산가족. 이것이 심훈가족의 가족사에 비친
역사의 빛과 그림자이다.
- 편집자주 -

 

 

 26일 오전 11시, 햇살은 완전히 봄기운을 찾았지만 어디선가 매운 바람이 불어와 겨울의 마지막 위세를 떨치는 시각. 이지운(73세)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를 올랐다.
 이틀전 부곡리 필경사에서 있었던 ‘상록수 문화관’ 준공식 겸 심훈선생의 시비 제막식. 그곳에서 잠깐 통성명만 나눈 이할머니와 그대로 인연을 끊어버리기에는 기자로서 여간 아쉬움이 남는 게 아니었다.
 세상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와 그의 삶을 둘러싼 만남이란 그중 비상한 인연임에 틀림없었고, 뭔가 새로운 사실 또는 진실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역시 그랬다는 것은 두시간 남짓한 만남에서 확인되었다.
 이지운 할머니가 기거하는 곳은 아파트 10층. 마침 그집 창밖으로는 남산꼭대기 상록탑이 쳐다보기 딱 좋은 위치에 서 있어 얘기하는 동안 내내 눈에 들어왔다.
 “예 앉아있노라면 노상 저 상록탑이 보여. 마음도 자꾸 그리 끌리지”
 할머니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후 1년에 딱 한번씩만 막내아들네 다니러 나오신다는 할머니는 때마침 귀국한 길에 행사가 있어 참여했다고 한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 할머니의 남편 심화섭(75세) 옹과 작고한 심훈선생은 사촌지간으로 모두 부곡리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심훈선생 가족들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부인이 팔방미인었어. 파평 윤씨였는데 인물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문장도, 인품도 퍽 뛰어났지. 아마도 자제들이 심훈씨보다 제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나봐”
 할머니는 심훈선생을 ‘심훈씨’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제들이 제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을 게라고 몇번이나 말씀하신다. 지금 윤씨 부인(81세)은 뉴욕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몸도 마음도 여전히 아름답고 건강하다고 한다. 다만 분단때문에 겪는 고통이 한가지 있다고. 그러면서 심훈선생의 3형제 아들 얘기를 하신다.
 “둘째아들 재광이는 유명한 생물학 박사고, 세째 재호는 아버지처럼 언론인이지. 동아일보에 있다가 지금 뉴욕에서 한국인 신문 <일간뉴욕>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어. 모두 재주덩어리들이야. 그런데 전쟁때 헤어진 큰아들이 북한에 있어”
 할머니는 세째아들 재호가 어머니를 모시고 언젠가 북한에 가서 만나고 왔더라는 얘기를 하신다.
 “이 책 좀 보세요”
 기자는 할머니 앞에 책 한권을 디밀었다. 바로 그얘기. 세째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이북에 있는 큰형을 만난 이야기를 쓴 책. 심재호 저자로 된 「37년 걸린 길」이었다.
 그 책속에서 작가 심훈가족의 삶이 여느 이산가족과 다름없는 아픔을 지닌 채 역사의 한 귀절을 장식하고 있다. 역사가 남기는 빛과 그림자는 어떤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의 일생도 비껴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3남 심재호씨는 현재 뉴욕 <이산가족 찾기 후원회> 총무로 있다.
 할머니는 책표지를 뒤적이시더니 거기 실린 심훈선생의 3남 심재호씨의 사진에 시선을 붙들고 한참을 계셨다
 “애가 그중 아버지 얼굴을 많이 닮았다고 해...”
 할머니는 불행이라는 말을 미처 하지는 않았지만 ‘심훈’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남은 가족사의 불행한 단면을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새김질 하는 듯했다.
 심훈선생에 대한 기억이나 일화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인타깝게도 자기가 송산면 삼월리에서 부곡리로 시집을 왔을 때는 심훈선생이 바로 작고한 뒤였다고 한다. 다만 그분에 대해 듣기로 다정다감하고 효자였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노라고 한다.
 “부모한테나 누구한테나 다정다감했대. 아이를 못 낳은 큰 부인도 이혼하고도 자주 살펴줬다고 하고... 논밭에 나가서 농사꾼들 일을 거들어 주곤 하면서 막걸리 걸치고 얘기도 많이 하고, 정성껏 취재를 하더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하곤 했지”
 지금 부곡리에 살고있는 심훈선생의 장조카 ‘심재영’ 옹이 농촌운동한다고 먼저 내려와 있었고 그뒤에 ‘심훈씨’가 내려와 합류했다는 얘기도 해 주신다.
 할머니는 일어서려는 기자에게 친척네서 갖고 왔다는 술맛을 꼭 보여줘야겠다며 극구 술잔을 권하신다. 좁고 또 좁은 땅덩어리, 그 안 깊숙한 당진이라는 곳에 인연을 두고,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채 아득한 시간을 가늠질 해보며 마시는 한 잔의 찹쌀술. 12시 대낮술 한잔을 들이키며 기자는 역사의 우물물을 한 두레박 퍼서 마시는 느낌이 든다.
 출생지가 당진이 아니라 하여 ‘상록문화제’의 의미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갑론을박은 남아있고... 다만 한가지, 한 시대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심훈선생과 그 가족의 얘기를 통해 우리는 동시대, 또는 그 연속선상에서 서로에게 진 빚은 없는가 생각해 볼 뿐이다.
 할머니는 기자에게 고맙다는 말만 거푸거푸 하신다.

/김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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