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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남산과 함께, 명물파전 개발해

 봄을 맞는 남산은 누구보다 봄맞이에 바쁘다.
 모처럼 겨우내 쌓인 심신의 습기를 털어내고 따뜻한 봄볕맞이를 위해 공원에 오르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남산은 스스로 겨울을 털고 꽃피울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당진에 하나밖에 없는 공원남산은 그 자체로서 당진의 명물이기도 하지만 명물로 치자면 남산에 와서나 먹을 수 있는 ‘파전’이 더 명물이다. 밀가루도 아니고 계란도 아니고 두가지 재료가 딱좋게 섞여 먹기도 좋고 맛도 좋은 상태로 접시에 담겨 나올 때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흐믓해진다. 여느 식사와는 달리 남산에 올라와서 먹는 파전은 그 희소가치때문인지 아무튼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흐믓하게 만든다.
 이 파전을 먹기위해 여름이면 남산공원 전체가 장사진을 이룬다. 때로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기다리면서도 여간해선 짜증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다려도 짜증내지 않을만큼 푸짐하고 맛있는 파전때문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바빠도 손님에게 소홀하지 않은 아주머니의 정성때문일 게다.
 어느새 파전과 함께 남산의 명물이 되어버린 파전아줌마 이복(52세)씨는 오늘도 손님맞이에 바쁘다. 남산이 당진에서 제일 바쁘다면 아주머니는 남산에서도 그중 제일 바쁜사람이다.
 아침 7시 30분에 새로 얻은 가게 ‘상록분식’의 문을 열고 밤 10시 문을 닫을 때까지 눈이 어딘지 코가 어딘지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다지 바쁘지 않은 날도 공연스럽게 이것저것 만지느라고 아침 7시 30분이면 일단 문을 연다. 남산에서만도 이미 13년 세월을 보내면서 몸에 베어버린 부지런, 또는 조급증, 아주머니 표현대로 하면 극성맞은 성격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극성이었다. 남편없이 어린 3남매를 키우며 가장노릇을 하기에는 그것이 필수조건이었고, 그 덕분에 한눈 한번 팔지않고 오늘까지 이렇게 떳떳하게 살아왔다.
 “휴~. 살아온 얘기 하자면 끝도 없지. 누군들 그렇게 고생않고 살랴마는...”
 늘 너무나 바빠 조금은 차가운 인상을 주던 아주머니는 일단 보따리를 풀자 쌓였던 얘기를 마구 쏟아내신다.
 “큰 애가 일곱살. 그 밑으로 다섯살. 막 돌지난 애들이 있었지. 그런데 예비훈련 다녀오다가 그만...”
 아저씨는 벌써 18년전에 뺑소니 차에 치어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떴다.
 서른 네살에 별안간 혼자된 아주머니는 1년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내다가 아이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당시 남산에 있던 비단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과수원 일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상처가 늑막염으로 번져 눕게 되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해 생전 남한테 신세지거나 실수하고 살아오지 않았건만 그때 두달치 방세를 거르면서 스스로 비참한 생각에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그집에서 나오고 남산에 있던 남편 묘옆에서 실컷 울고서 남산과의 인연을 비로소 시작했다. 당시 남산 관리인이던 최씨 할아버지의 가게에서 동업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자존심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4년전에 드디어 명물파전을 개발해냈다. 밀가루 반죽을 먼저 넣고,  해물을 넣고, 그 위에 당근과 파를 깔고, 계란을 풀어 살짝 얹고... 이렇게 손이 많이가는 파전은 어려운 만큼 맛있고 인기가 있었다.
 요즘도 파전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파값이 세배는 족히 올라서 4천원으로 값을 올려도 수지가 맞지 않는 편이란다.
 아주머니는 재작년에 과로로 탈장수술을 했다. 지금도 몸이 과히 건강하진 않지만 남에게, 하다못해 자식한테도 신세를 안지고 살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주머니는 작년에 장남을 장가보내고 손주를 봤다.
 고생하던 젊은시절에 비하면 많이 안정은 됐지만 달리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 뭔가를 남기고 싶은 끔. 그건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에게 남은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남산에 있던 남편의 묘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남편 묘옆에 버려진 쓰레기나 연탄재를 보는 일은 여간 마음아픈 일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묘를 손질하다 낫으로 손을 베고 돌아오는 일을 보는 것도 역시 마음아픈 일이었다. 다른 사정이 있어 결국 남편의 유골을 화장했는데 장남에게서 원망을 듣고있는 것이다. 「이기수」라는 아버지 이름석자는 남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런 시름 저런 시름, 정말로 많은 시름을 안고 아주머니는 오늘도 열심히 파전을 부치고, 칼국수를 빚는다. 그것은 아주머니가 아주머니 나름의 험한 가시밭 인생을 나름으로 열심히 가다듬고 헤쳐가는 방식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일어서 당당히 달려온 한 여성의, 한 어머니의 삶의 얘기.
 오늘도 남산은 파전아줌마 이복여사의 손길만큼 바쁘고 분주하다.
<김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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