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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농사 더불어 70년 한평생 - 한국최초 시설원예농 이명헌 옹(면천면 자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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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의 높은 파고속에 농업경쟁력제고를 위한 농민들의 발빠른 행보가 요구되는 요즘. 지금부터 반백년전인 1950년대초에 이미 당진군 면천지역에서는 전국 최초의 비닐하우스 시설농업이 도입돼 과학영농을 주도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있다.
 70평생을 시설채소농업에 헌신해 온 면천면 자개리 이명헌(69세) 옹의 삶을 재조명해본다. ● 편집자주 ●

 이명헌(69세)옹은 현재 면천면 자개리에서 2대째 시설채소농사를 짓고있다. 아들 이계모(37세)씨 역시 시설채소농사에 종사하는 농민후계자이며 전업농.
 이명헌 옹은 이제 농업을 은퇴할만한 고희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한 몸으로 하우스에서 손수 꽈리고추를 돌보고 있다. 지금은 아들이 도맡아 경영하고 있지만 아직도 농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버리지 못해 틈만나면 하우스를 조석으로 살피고 있다.
 인근에서는 제일 크다고 자랑하는 8백평짜리 연동하우스는 바로 그가 수십년간 젊음과 인내를 바쳐 일궈낸 땀의 결정이다.
젊은 농군과 학도의 개척심
 이명헌 옹이 비닐하우스 시설원예를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인 1954년 겨울. 당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재학중이던 동생 태현(63세. 대전. 경영인)옹으로부터 비닐하우스 농법에 대한 신기술정보를 얻게 된 것이 최초의 계기였다.
 여기에 사돈간으로 같은 부락에 살며 농대에 재학중이던 박종기(현재 동원종묘운영)씨가 가세해 얼마되지 않는 좁은 농토에 과감하게 목재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훗날 면천지역을 우리나라 중부권에서 최초로 비닐하우스 시설원에 농사의 시배지가 되게 한 소중하고 역사적인 첫삽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젊은 학도와 농군의 개척정신이 만들어낸 값진 작품이기도 했다.
 1954년 이명헌 옹이 처음 실시한 비닐하우스 면적은 3백24평.
 하우스라고 해봐야 지금과 같은 고급 시설자재가 있을 리 없었고, 뒷산에서 가느다란 소나무를 베어다가 껍질을 벗기고 말려 집을 짓듯이 양지봉형으로 못을 박아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히 그당시 처음 개발되어 보급단계에 있던 비닐이 있어서 그걸 구해다 씌워 그안에 온상을 만들고 오이를 심을 수 있었다.
 이명헌 옹의 하우스재배는 일반 농가보다 3개월이나 빠른 1월에 종자를 파종하여 4월초에 정식하고, 재배방식도 대나무로 지주를 세워 재배해 그결과가 상상외로 컸다.
 일반 노지재배 농가보다 2개월이나 빠른 5월초에 출하가 가능했고, 그결과 3백24평의 작은 규모의 면적에서 한해에 무려 7백5십만원(현시가로 7천5백만원 상당)의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명헌 옹의 비닐하우스 농사는 그후 40년간 후퇴할 줄을 몰라 처음 논 7마지기뿐이던 영농규모도 지금은 논 40마지기와 과수원 7천5백평의 대농장으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68평짜리 저온저장고와 8백평짜리 현대식 시설의 연동하우스까지 갖추어 꽈리고추 한작목에서만도 연간 2천만원의 수익을 올리는 전업농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하우스시설재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8남매의 자녀를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보냈다.
일일이 물지게 지어날라
 초창기부터 서서히 인근지역으로 파급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농사는 그후 면천면 일대는 물론 당진군 전역과 인근 예산, 서산까지 널리 확산되었고, 재배작목도 오이에서 꽈리고추, 토마토, 시설쪽파등 다양하게 보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명헌 옹의 포장을 비롯한 자개리 부락은 인근농민과 관내외 각종 농민단체들의 현장교육 및 견학장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농예기술학교까지 설립하여 원예기술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여기서 배워나간 하우스재배 기술로 인해 현재 도내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면적은 5천2백ha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에 있어서 가히 성공적이긴 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시설원예농업은 포장에 물공급을 자유로이 조절하는 것이 관건인데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농촌에는 전기가 없었고, 특히 자동펌프나 전기모타를 이용한 관정시설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작물에 필요한 물을 일일이 물지게에 지어나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농물쪾차량등 운송사정이 지금처럼 좋지가 않아서 생산된 오이는 생산농가가 직접 버스가 닿는 인근 남산정류장까지 4Km나 되는 거리를 일일이 등짐으로 날라야 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문제는 하우스를 지을때 비닐을 입히는 일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폭이 넓은 비닐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1954년 첫해 3백24평의 하우스를 짓고 비닐을 덮는데 자그마치 10명이 3일간을 꼬박 작업해야 했다고 한다.
 특히 폭설이 내리거나 강풍이 부는 날이면 하우스 시설이 무너질까봐 온가족이 밤잠을 설치는 경우 또한 허다했다고 한다.
정부의 정책 노력 당부
 이명헌옹은 UR농산물 개방파고를 예의 주시하면서 앞으로 작목을 꽈리고추보다 다소 경쟁력이 있어 보이는 시설포도로 전환해 볼 생각이다.
 또 현재의 반자동 하우스 시설을 자동화시설 쪽으로 바꾸어 생산비를 절감할 계획이다.
 40년간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하우스 농사를 지어온 이옹은 비닐하우스를 통한 과채류 농사의 성공비결을 「남보다 질좋은 물건을 남이 생산하지 못하는 시기에 생산 출하」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이명헌옹은 두가지 목표를 늘 염두해 두고 4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계속 연구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우리농업이 이제 국제화시대에 맞춰 세계시장으로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생산농민 자신의 부단한 노력뿐만 아니라 생산비 절감을 위한 시설개선지원과 세계시장 확보를 위한 판로개척등 농업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정책적 노력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했다.
<자료제공 농촌지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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