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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곡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은행나무는 올해 나이 7백67세. 은행나무는 이 마을의 오랜 내력 또는 전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런지 월곡리 부녀농악대나 월곡리 볏가릿대 놀이등 전통은 월곡리에서 비교적 왕성한 잔재를 보이고 있다.
 당진농악대 김의석(72세) 회장도 월곡리 사람이다. 4년전 창립한 당진농악대는 각 면에서 뛰어난 재주꾼들만 모아 만든 농악대로 일반농악대와 수준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회원은 모두 21명이고 나이는 대부분 60을 넘었다.
 회장 김의석 옹은 월곡리 부녀농악대와 상록국민학교 농악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70이 넘은 지금도 풍물과 전통에 대한 남다른 열정를 갖고 있는 김의석 옹은 풍물과 농사가 혼합된 두레풍물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농사의 전형적인 모습은 두레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두레풍물이 함께 했다. 그때는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채로 생활속에 녹아있었다.
 그 풍물가락에 유난히 흥과 신명이 났던 소년 김의석은 어른들 뒤를 따라다니며 일찍부터 혼자 터득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열 네살. 누가 달리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 타고난 기질 덕에 피리를 곧잘 불었던 그는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세 분의 스승으로부터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꽹과리는 부곡리 김정배선생으로부터, 벙거지(상모)는 오곡리 조석순선생, 나머지는 부곡리 이용균선생에게서 배웠다. 지금은 모두 작고하셨다.
 그는 피리를 불던 뱃심으로 쇠납(호적, 일명 날라리)을 또한 잘 불었다. 지금도 당진농악대가 가는 곳, 쇠납을 불 일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나선다. 그런데 김의석 옹은 아주 잠깐씩 숨을 쉬는 사이사이 불현듯 풍물소리 속에 섞인 날라리 소리가 아주 끊기는 것은 아닌가, 요즘의 세태속에서 풍물자체가 대가 끊어지지는 않을까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초조감을 느끼곤 한다.
 “안타깝구 말구, 세상이 많이 변했어. 옛 것이 다 사라질 지경이여. 옛날에는...”
 김의석 옹은 잠시 기억에 잠긴다.
 ‘옛날에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사는 일에 대한 신명은 있었어. 일하기가 힘들 때 풍물로 흥을 돋구고 얼카뎅이 얼카뎅이 소리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였지. 그런 사람들 사이에 니꺼 내꺼가 어디있고, 이기심이 어디 있었겠어?’
 아마도 김의석 옹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풍물조직은 곧 두레조직이었지. 두레조직에는 체계가 있었어. 나이어린 초년생은 ‘꽁배’라고 했고, 정식 ‘두레꾼’이 되어서야 김매기나 보리타작할 때 품앗이를 다녔지. 두레꾼을 데리고 다니며 적당한 일을 붙여 총괄하는 사람이 ‘공원’이었고, ‘문서잡이’가  50명되는 두레꾼 각각의 논에 대해 일하기 쉽고 어렵고에 따라 등급을 매겼지. 두레의 우두머리는 ‘좌상’이라고 불렀지.
 김의석 옹은 두레조직에 대해 소상히 일러주었다. 51세에 마을 두레조직의 ‘공원’을 맡기 시작한 김 옹은 92년 KBS TV프로 「맛따라 길따라」라는 프로에 마을 두레조직 대표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세상의 변화를 아쉬워하는
 김 옹이지만 현대화가 불
가피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지킬것은 지켜야 하고, 그것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두레풍물, 풍물놀이에 담긴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제대로 담아내면서 맥을 이어가며 현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풍물의상
과 상모에 대해 구체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
 “청쪾홍은 죽어서나
 살아서나 배필을 맞
을때나 늘 사용하던 색이지. 청은 하늘을, 홍은 땅을 상징하는 뜻으로 말이지. 그런데 검은 색은 아니야. 그리고 부포상모는 우리 당진의 전통과 무관해. 상쇠와 부상쇠가 짧은 상모를 썼었지”
 안타깝게 얘기하는 김의석 옹에게서는 칠십평생을 고스란히 바쳐온 이 풍물놀이를 제대로, 아주 제대로 남기고 싶은 열망과 갈증이 느껴진다. 70노구에도 차돌같은 젊음으로 남아있는 김옹과 그의 열정은 우리것의 가능성이 이토록 팔팔함을 웅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송악면 월곡리 김의석 옹의 삶은 두레와 풍물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일평생에 다름아니다.
 벌써 젊은세대에게는 두레니, 풍물이니 하는 따위가 기껏 과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적어도 전통농경문화속에서 살아온 기성세대에게는 눈물날 지경으로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마치 동상이몽처럼 오늘의 신세대와 구세대는 한시대를 이루고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질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화란 과거의 전통과 맥을 잇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새로운 것이요, 과거와 다소 갈등을 형성하더라도 과거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완전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가지 정서가 형성된 데에는 따라서 현대적인 것에 더 책임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더도 덜도 말고 일제시대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가 엄청난 왜곡과 침체의 길을 걸었으리라는 역사적 추측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지금 우리의 정서가 과거로부터 도도히 흘러온 오랜 뿌리로부터 단절되어버린 어설픈 것이라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면서 아직도 가슴떨리는 그리움으로 쇠납을 불어재끼는 김의석 할아버지에게 새삼 눈길을 돌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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