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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으로 ’83 국전대상수상-아미산 산기슭에 터잡고 작업중인 화가 박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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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 그리고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 당진읍 채운리에서 출생, 당진국,당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추계예술대학을 거쳐 Paris고등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주 어릴적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국민학교에 들어 가면서, 공부보다는 만들고 그리는 일에 시간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6학년때 그림 그리시는 담임 선생님을 만나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고, 저도 귀여움을 받기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중.고등학교때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 그림을 계속 하던중 고3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창환 선생님의 시사를 받아 전문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것 같습니다.
 그런 좋은 선생님을 만난것도 계기였지만 저에게 그림외에는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실명의 고비를 몇번 넘기며 밤새워 그림을 그리던 대학시절의 그림에 대한 집착과 정열을 지금도 주위에서 종종 얘기하곤 합니다.

■박선생님은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인물’로 많이 알려져있는데 실상 그 그림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시기는 구체적으로 언제이며, 어떤 소재, 어떤 주제의 그림이었습니까?
 - 제가 수상을 한 시기는 83년이고 소재는 사당동, 미아동등을 전전하며 살던 판자촌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통해서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불과 10여년전의 일이지만 당시 상황은 계속되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빈부의 차는 극에 달했고 문화의 흐름도 정치인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뜻있는 예술인들이 당시 현실에 저항하는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그 결과 미술계에서는 민중미술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당시 그들과 직접적인 교류도 있었지만 혼자만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저항해보려는 의도도 강했습니다.
 수상 당시 기관원(?)들이 찾아와 “좋은 아파트도 많은데 왜 하필 판자촌을 그렸느냐”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해 함구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숙히 현실에 참여하며 작품활동을 계획하던 중 체제에 대한 혼란과 표현에 대한 한계에 부딪쳐 무척 방황했습니다.

■수상 당시 소감은 어땠습니까?
 - 그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였기에 덤덤하기만 했습니다. 한편으론, 해야할 그림이 너무 많은데 종지부를 찍은 듯한 기분도 들고 여하튼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상작품이후 판자촌은 한장도 그리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유학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기간은 언제부터 얼마동안이었으며, 프랑스 유학기간동안 섭취하거나 변화한 내용은?
 -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경하고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 Paris. 수상과 더불어 세계일주라는 기회가 생기게 되어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4개월의 긴 여행은 프랑스 유학을 결정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네명중 한명이 예술가라는 Paris. 예술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유를 무리없는 질서속에서 100%이상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어떤 표현도 가능하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작업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것 같은 흥분과 함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배낭하나 메고 Paris에 도착하여 6개월 후 학교에 입학하여 8년6개월간의 Paris생활이 시작됩니다. 8년반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느끼고 변화된 나의 생활을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얘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내가 변화된 것중의 가장 큰 것은 어떤 재료, 소재, 주제 앞에서도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된 것이고 어떤 조건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역사속의 대가들의 작업현장을 모두보고 분석하며,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30대 이상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전시를 통해 그들과 비교하며, 나의 위치와 작업을 점검하곤 했습니다.

■유학생활에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유학생활에서 어려웠던 점은 많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 고통이었고, 두번째는 고독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뼈를 깎는 번뇌와 좌절속에서 몇번이나 유학을 포기하려 했었고,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모든 괴로운 것들이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녹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생활을 갖게하곤 했습니다.

■결혼도 하셨는데 결혼생활을 포함해 요즘의 근황을 말씀해 주십시요.
 - 며칠후면 결혼한지 일년이 되어가지만 그간 거의 같이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작업실을 찾아 전전긍긍했고, 그녀는 서울에서 작업을 했으나 이번 5월부터 여기 작업실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의식주가 편해진다는 것보다 옆에서 같이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미안한 것이 있다면 자상하지 못하고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
 현재는 교육청의 배려로 유동국민학교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목요일엔 서울에 올라가 강의하고 일요일 오전에 내려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 올 11월 3일 서울에서 개인전을 갖고 내년 5월 청담미술제에 참가하며 10월경 일본에서 전시를 갖게될 예정입니다.
 그룹전은 소모전 같은 양상이 강하기에 되도록 피하는 입장이고 개인전 위주의 작품활동을 당분간 계속할 것입니다.
 제가 현재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지금의 장소에 미술관을 계획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지는 않지만 밀도있는 작품을 선택하여 전시장을 개방하고 방학때마다 여름학교를 운용해 재능있는 후배들을 발굴,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여건이 저의 부족한 탓으로 난관에 부딪치곤 합니다.

■국전수상 당시 추구하던 그림의 내용과 지금 현재 추구하는 작품의 내용중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점입니까? 그리고 변하지 않은 점은?
 - 그 당시의 그림이 100% 감성과 테크닉으로 그려져 있고 시대적 상황과 경직된 교육에 의한 갈등을 느끼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면 현재는 분석에 의한 재조립일 것입니다. 자유롭고 감성적인 계기와 절제된 이성의 가미로 치밀한 계획에 의한 그림을 그리려 하지요. 그러나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끝없는 실험정신입니다. 어떤대상이나 사고에 집착하지 않고 변화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품세계의 특징을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 나의 작품세계는 특정한 양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회화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구사하며 대상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으로 늘 변화무쌍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소재나 주제에도 한정치 않고 회화의 흐름에도 관여치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나의 감성에 걸려들면 어떤 방법으로든 작업으로 끌고 나갑니다. 언제까지 이런형식의 작업을 계속할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만족합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싸움이고, 계획하고있는 것에 대한 파괴인지도 모르지요.

■예술활동이 사회와 인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박선생님의 ‘예술관’을 듣고 싶습니다.
 - 예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하자면 문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종교적인 특수성에 따라 다르고 특히 사상적인 환경에 따라 너무나 세분화되어 섬세하게 영향을 미치기에 다음기회에 또다른 지면을 통해 얘기할 기회를 갖겠습니다.
 나의 작품세계와 예술관이 중복되는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체험은 나의 교과서입니다. 시각적 체험이든 정신적 체험이든 모든 것은 나의 소재입니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도, 끝없는 방황도, 기쁨도 나의 소재가 됩니다. 아름다운 것, 그로테스크한 것, 추한 것, 모든 것이 나의 소재입니다. 어느곳에도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그림 또는 예술활동에 뜻을 가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 20셰기가 낳은 독일작가 ‘안셀름 키퍼’는 “그림은 노동과 같다” 얘기했습니다. 그가 노동이란 말속에서 정신적 고뇌에 더 무게를 둔 것처럼 그림작업은 늘 사고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감성은 예술표현의 시발점을 만들고 이성은 완성으로 유도합니다. 감성과 이성을 적절한 양으로 배합하여 작업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예술은 거대한 숲입
니다. 숲안에 있는 나무 몇그루, 풀 몇포기 안다고 모든 것을 안 것처럼 자만해있는 사람처럼 불행한 예술가도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늘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합니다.
 남이 버린것에 얻을 것이 있고, 남이 보지 않는 것에 볼것이 있고, 남이 가지 않는 곳에 갈곳이 있습니다. 도약대 위에 선 다이버처럼 늘 긴장하고, 느긋한 충족에서 쉬지않고 당당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특히 당진의 문화현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 문화의 매력은 결정적 표출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전체의 문화적 모순은 여러분야에 있던 장인들을 계승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전통문화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해 과거지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이 현실지향이라 본다면 일본의 문화는 미래지향형, 중국의 문화는 침묵지향형이라 분석한 학자가 있습니다.
 문화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것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래에도, 어떤 변화 앞에서도 우리의 문화는 살아있을 것인데 왜 과거에만 치중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지역문화라는 것도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문화공간이 도시에 밀집되어 있고, 문화예술인들은 지방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역문화가 도시문화의 과거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화의 성장에는, 특히 지역문화에서는 관심이라는 약이 필요합니다. 어떤분야에서 어떤일을 하든 어떤 형태의 문화행사가 벌어지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심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양명언처럼 관심은 형성의 기본입니다.
 문화인들도 삼삼오오 분열되어 내용없는 단체나 만들고 생색이나 내는 일에서 떠나 진지한 태도로 전문성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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