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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교단, 아이들을 위해 - 합덕농고 김지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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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숨어드는 오후 5시. 오랫만에 느껴보는 생활의 여유속에서 김지철(44세. 합덕농고) 선생은 동료교사와 함께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달아오른 운동의 열기가 온몸에서, 검붉은 얼굴에 맺힐즈음 선생은 조용한 걸음으로 기자와의 만남을 준비한다.
 김지철 선생의 올해 나이는 44세. 결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지만 첫 대면에서 느끼는 감정은 절대로 가늠할 수 없는 칠면조의 변신술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같은 분위기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선생의 크고 작은 삶의 단면속에서 베어나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상과 사안에 따라 온유함에서 처절한 수도자와 같은 모습으로, 또는 천하를 호령하는 사자호의 외침과도 같은 비장한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선생은 충남 천안에서 평교사이신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수습되던 시대상황인지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교육자 집안의 가정윤리를 몸에 익히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천안중앙고 시절, 선생은 도산 안찬호 선생의 뜻을 이어만든 “흥사단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이후의 대학생활과 교직생활에 많은 실천의 지침과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몸에 베인 근면성실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에 아버지의 뜻이 부합돼 1970년 공주사대 영어교육학과에 뛰어난 성적으로 입학한 그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아르바이트와 각종 괴외활동으로 자립심을 키워간다.
 당시 70년대 초반의 강압적인 국내정치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삶의 방향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육에 결부된 자신의 삶속에서 분단과 권위적인 정치에 의해 왜곡된 사회현실에 지성인으로서 어떻게 준비하고 참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같은 고민은 당시의 대학풍토 속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진지함 이있으며, 역사와 철학, 인문.사회과학에 이르는 폭넓은 독서로 그는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76년 11월 3일.
 선생의 첫 교편생활이 충남 태안 여중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감개무량한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다.
 “오늘은 11월 3일 학생의 날입니다. 오늘 같이 뜻깊은 날, 여러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니 너무나도 기쁘고 감개무량합니다. 학생의 날에 ‘처음으로’ 선생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학생을 위해서, 학생의 입장에서, 같이 배우고 살아가려 합니다.”
 흥분에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얘기했지만 교실안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냉담해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한다. 후에 알게 된 사정은 당시 중동붐으로 전국의 영어선생, 특히 지방벽지 영어선생의 씨를 말리는 특채바람이, 중동진출 기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어교사의 자리는 고작해야 몇개월 수명이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얼마나 있다가 가실거예요?”
 이런 학생들의 냉담한 반응은 이유가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학생들의 불안감과 누적되어 온 교과진행을 통신문과 등사기 복사를 통해서 해소시키며,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던 역사기행, 가정방문, 그리고 생활교육, 교과교육, 인성교육을 진행하며 3년동안의 태안여중 생활을 마감한다.
 교편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곳이기에 많은 감회와 뿌듯함이 있었지만 아직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도시취향과 교육의 결과에 대한 성급한 기대, 그리고 의욕만 앞섰던 점 등을 평가반성하며 나름대로 교육자세, 교육관을 다듬어 갔다.
 “교육은 민족사회 발전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기반이며, 이같은 기반은 올바른 교육체계와 제도속에서 교육의 3주체가 굳건한 자기 자리를 잡아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일생의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자아실현의 기초를 완성하는 전인교육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틀을 교사가 제공하고 아는 것 만큼은 충분히 실천할 수 있도록 친밀한 대화로 이끌어 내야 합니다.”
 참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1989년에 출범한 전교조의 활동에 그가 참여하게 된 배경도 이같은 교육관과 무관하지 않았다. 5년이 넘는 해직생활 속에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두자녀의 아버지로서 인간적인 아픔을 겪어야 했던 지난시절. 경제적인 고통과 가족관계, 내면의 일시적 좌절감등 개인적인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더욱더 깊게 심어진 교육에 대한 열망은 아픔만큼 더 클 수 있다는 성숙의 의미를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교단에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제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진정한 교육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근래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풍조와 어린이 성폭력, 부모살해등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아픔을 같이 나눌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는 그는 인간화 교육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복직 후 새로운 분위기가 어색해 한동안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김선생은 신세대의 감각과 생활단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학생들과의 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새롭게 시작된 독서왕 선발, 새롭게 자리잡은 직원 휴계실, 이제 많은 변화의 틀이 조금씩 준비되고 있다.
 과거에 이루어 놓았던 선배교사들의 업적과 경험에, 현대사회의 제반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제도와 틀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남아있다. 더욱이 지방실업계 학교의 상황에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전공과목의 개발과 아이들의 당당한 사회진출을 돕기위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편하게 갖지 못했던 여가시간이 잠시 있는듯 했지만 선생은 사고당한 학생의 병원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신다.
<김병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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