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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4-18 13:5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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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숭동 대학로를 ‘김빼는 거리’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재미없어 김빼는 거리가 아니다. 대학로는 그럴수가 없는 곳이다.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하자. 무쇠두껑을 마냥 눌러놓으면 막바지에 어떻게 될까. 터지고 만다. 반드시 김빼는 구멍이 있어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지난 시절 대학로는 우리사회에서 유일하게 김빼는 곳이었다. 관습에 또는 정치적 억압에, 무력감에 억눌려 있던 자유를 발산할 수 있는 곳. 대학로는 여러사람에게 참으로 여러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 장철식(36세). 제도화된 틀속에서 부여받은 「작가의 권위」가 있건 없건 예술에 취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열정을 드러낼 수 있는 곳.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거리」와도 같은 대학로에서 그가 대중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온지도 8년이 됐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한 작업의 결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친구와 함께 대학로에서 첫 「거리의 화가」가 된 그는 접는 낚시의자 하나로 색다른 세계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차츰 어색함없이 그림을 청해왔고, 1장에 1만원~2만원 꼴로 인물화 따위를 그려주면 그때그때 생활비 정도도 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얼굴그림을 당한 사람은 1만명정도. 본의 아니게 관상에 대해서도 터득한 바가 생겼다.
 그리고 그는 이른바 학연으로 줄이 이어진 제도미술계 밖에서 예술 속앓이를 하는 재야미술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대학로를 무대로 하고 나선 온갖 종류의 예술지망생들을 모아 내부규율을 만들어 「마로니에 예술동우회」를 조직,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예술에 대한 열정을 진지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질서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주말이외의 시간은 자기작업에 몰두했다. 그가 천착해 온 작업은 서민의 삶과 「흙」이었다. 특히 서민의 모든 정서를 담고있는 옛날 시골의 잔칫집 풍경은 그가 늘 끄집어내 완성해보려고 애써온 이미지였다.
 “그렇지만 저의 그림은 늘 공모당선을 위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연이 없는 저로서는 그걸 발판으로 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나 「전시」를 위한 그림은 가벼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은 다 버렸습니다”
 그는 수차례 공모에서 다수의 입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선경력이 자신의 그림에 프리미엄으로 붙는 게 싫고 오로지 그림을 평가받고 싶었던 그의 이력서는 늘 백지였다.
 그는 이제 고향 모평리에 돌아왔다. 새로운 작업, 평가자의 구미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위해 그는 새로운 준비를 하고 있다. 미술은 업보이면서 자신이 인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식임을 다시한번 자각하면서.
 현재 부인과 두아들이 있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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