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18 13:58 (목)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기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참되고 진실되게 살면 되는 거야ꡓ

 

 심훈선생의 조카 청석 심재영(84세) 옹을 찾아 간 날은 지난 토요일, ꡐ위중하셔서 만날 수 없다ꡑ는 사모님의 간곡한 거절을 무시(?)하고 무작정 필경사 근처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ꡐ말씀이야 하실 수 있겠지ꡑ 참 무례한 욕심이었다.

 협심증에 신부전증까지 겹쳐 오래전부터 병상에 있는 심재영 옹은 ꡒ재미있는 얘기부터 하자ꡓ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ꡒ숙부 얘긴 그동안 너무 여러번 해서 할 말이 없어. 재미도 없구....ꡓ

 무슨 얘기부터 할지 뻔하다는듯 그는 이렇게 먼저 운을 뗐다. 그리고선 ꡐ묘한 얘기ꡑ를 하나 해 주겠단다.

 ꡒ내가 이렇게 누워만 지내다보니 별의 별 생각 다하지. 절에 가면 불상이 점잖게 모셔져 있지? 그 부처님은 참 답답할거야. 다리도 멀쩡하고 팔도 멀쩡한데 가만히 가부좌 틀고 앉아있어야 하니 내가 요즘 그런 심정이야ꡓ

 마음은 아직도 3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할 때와 같이 새파랗다는 심재영 옹. 풀린 땅에 쟁기질 한번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리라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여든 넷의 병든 몸이었다.


총독부 검열받은

 시집 「그날이 오면」 발견


 심재영 옹은 가끔씩 그런 ꡐ묘한 얘기ꡑ 섞어가며 이런저런 얘길 했다. 비록 그가 재미없다던 숙부와 관련된 얘기가 태반이었지만...

 ꡒ한 사흘뒤에 왔으면 아주 특별한 걸 볼 수 있었을텐데. 그게 특종감일껄. 총독부 검열필이 찍힌 숙부 시집 ꡐ그날이 오면ꡑ을 찾아냈지. 60년만에 사흘뒤 나한테 오기로 돼 있거든ꡓ

 간신히 출판허가는 받았지만 온통 붉은 줄로 삭제표기가 된 그 시집이 얼마전 작고한 사촌계수의 한 귀퉁이에서 나왔단다. 시는 많이 알려진 것들이라 새롭진 않지만 일제의 검열이 얼마나 상식이하였고 가히 폭압적이었던가를 생생히 볼 수 있다는데 의미가 큰 책이라고. 그래서 영인본으로 일이백권 정도 낼까 생각중이란다.

 그 이후의 얘긴 주로 준비해 간 내용들에 대한 것이었다. 유물관리는 어떻게 할것이며, 필경사와 상록수 기념전이 방치돼있다시피 한데 안타깝지 않은가 하는 등등이었다.

 그는 ꡒ숙부가 워낙 짧게 사셔서 관리할 유물이 별로 없다ꡓ는 말로만 대답을 대신했고 필경사와 상록수 기념관에 대해선 ꡒ우리나라 행정이 문제가 많다ꡓ며 안타까워 했다.

 ꡒ몇푼씩 월급주고 관리인 하나 둬야 하지 않겠냐고 수차례 요청했어. 근데 알았다고만 하지 시간이 좀 지나거나 군수가 갈리면 또 깜깜 무소식이야.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일을 추진해야 하는 건데ꡓ

 안목없는 행정은 낭비일 뿐 무의미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1930년대 

공동경작회 꾸려

농촌계몽운동 벌여


 심훈선생에 대한 추억담과 심재영 옹의 살아온 얘기는 94년 발간된 그의 수상록 「사랑하는 나의 마을에 서서」에 자세히 쓰여있다.

 심재영 옹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그곳에서 농업전문학교를 마친후 1930년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단신으로 송악 부곡리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동네 청년 12명과 공동경작회를 꾸려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운동을 활발히 벌여나갔다. 심훈선생이 부곡리로 내려온 것은 1932년. 심재영 옹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심훈선생은 필경사를 짓고 집필에 몰두해 문제작 상록수를 탄생시켰다. 부곡리 공동경작회가 그 소설의 모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훈선생은 또한 부곡리 애향가를 지어 마을 사람들이 즐겨 를 수 있도록 했는데 일제는 그 애향가가 불온한 내용이라며 탄압을 일삼았고 강제 공출로 인한 운영난과 회원들이 하나둘 징용으로 끌려가 결국 공동 경작회는 1941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심훈선생도 상록수 집필후 돌연 사망해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분단의 소용돌이속에서 심재영 옹이 어떻게 살았는지 수상록엔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공동경작회와 그를 사상이 불온하다고 모질게 탄압했던 고등계 형사가 신생 대한민국에서 서장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좌절감에 빠져 ꡐ눈가리고, 귀먹고, 입다물고ꡑ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농촌을 떠난 적은 없었다고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ꡐ사명ꡑ을 갖고 태어난다


 ꡒ거짓말 안하고 남 속이지 않고 될 수 있는대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지. 난 내 인생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ꡓ

 혼란의 시대를 한평생 살아오면서 말년에 그렇게 자기 인생을 회고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비록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지라도 말이다. ꡐ허무함ꡑ보다 ꡐ자부심ꡑ을 갖는다는 그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긴 무엇일까?

 ꡒ인간은 누구나 ꡐ사명ꡑ을 갖고 태어나 자기가 해야할 몫이 반드시 있다는 얘기지. 그 사명을 저버리지 말고 참되고 진실되게 살면 되는 거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면서.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하거든ꡓ

 그리고  ꡒ받는 사랑은 빚이지만 주는 사랑은 재산이므로 반드시 주는 사랑을 해야 한다ꡓ는 말도 덧붙였다.

 욕심만큼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사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심재영 옹도 무척 힘겨워 하는 것 같았다.

 사흘뒤 특종을 취재하러 오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집을 나왔다. 근처 필경사와 상록수 기념관엘 들렀다. 텅빈 채 굳게 잠겨있는 상록수 기념관이 따뜻한 봄 햇살에도 ꡐ썰렁ꡑ해 보였다.


/이명자 기자/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