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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에 죽은 가족보며 신앙, 의료에 관심

근면, 봉사철학 일관, 도암장학회 운영해



 서울 서대문구 총청로 3가 277번지. 종근당 빌딩을 돌아  조금 내려가면 정갈하고 아담한 2층 한옥이 있다. 얼핏보면 한 3대쯤 옛날 선비가족이 살고 있을듯한 이 집이 바로 의학전문서적 출판사로 유명한 좧여문각좩이다.

 여문각에는 당진읍 원당리가 고향인 장석태(57세) 사장과 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사무실의 외모와 규모가 뜻밖이라고 얘기했더니 장석태 사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문을 연다.

 ꡒ프랑스에는 좧Nature좩(자연)라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과학잡지가 있습니다. 세계의 이름있는 의사나 학자들이 이 잡지에 글을 싣는 걸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고 있죠. 그런데 그 출판사는 다락방에다 고작 직원이 두명 뿐입니다ꡓ

 여문각의 첫인상과 장석태 사장의 이런 얘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격식과 외양보다 내실을 중히 여기는 듯한 삶의 자세이다.

 장석태 사장이 도서출판 여문각을 창설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69년도. 63년 동국대학교 법정대 경제과를 졸업했지만 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장씨는 월간 좧중앙의학사좩에서 편집부장직으로 재직한 뒤 독자적인 의학전문 출판사를 열게 된 것이다. 말이 25년이지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의료서적분야를 뒤적이고 파들어가다보니 이 분야에서 알게 모르게 공로자가 된 것은 물론 의료인들과의 접촉쪾연구를 통해 식견도 전문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는 우리나라 보건정책의 문제와 의료서비스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실토했다. 알고보니 그의 어릴적 꿈은 목사나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어린시절에 겪은 한가지 사실에 연유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년뒤 당시 당진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장씨는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와 여섯살난 사촌동생, 그리고 네살된 손아래 동생의 고통스런 질병과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의 길에 대한 미련을 갖게 된 그는 목사나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진학지도를 제대로 받지 못해 당시 인기가 좋았던 경상계에 지원을 하게 됐던 것이라고 한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학한 대학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낯선 서울서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옷 하나를 사서 사철 단벌로 입고 다녔던 그는 남의 집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고 대개의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그는 이 당시 여덟끼를 계속 굶은 뒤 남의 집 잔칫상을 받고 나서 다음날 새벽운동 나갔다가 대로변에 똥을 눌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거리낌없이 이러한 사실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때 ꡐ분에 넘치는 과욕은 반드시 탈이 난다ꡑ는 깨달음을 경험을 통해 뼛속 깊이 터득했기 때문이다.

 ꡒ그 시절에 가난은 지긋지긋한 것이었죠. 병과 죽음도 다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었구요. 나의 젊은시절은 이러한 가난과 질병을 우리사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부자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습니다ꡓ

 타고난 대쪽같은 성격에다 4.19세대가 지닌 혈기와 정의감,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진 이러한 인생철학들이 지금의 ꡐ장석태ꡑ를 있게 만든 기틀이었다.

 현재 그는 8년전부터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도암 비법인 장학회를 통해 당진의 8개 고등학교 어려운 학생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출판업에 종사하는 자신의 잇점을 십분 발휘해 군내 각급 학교 도서관에 수천권의 도서를 기증한 바도 있다. 고향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작년 가뭄 때 양수기 10대를 당진읍에 보내온 것을 비롯해 농기구 보내기 운동에도 열심이다.

 다방면에 걸친 사회활동도 두드러져 공해추방 국민운동본부 부총재와 국제라이온스 지역부총재도 맡고 있다.그는 반드시 자신에게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봉사요, 그것은 곧 ꡐ효ꡑ와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ꡒ정치 역시 봉사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개인의 영욕을 위해서 하는 것은 바른 정치가 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아직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정치인은 없고 지역할거주의에 바탕을 둔 정상배들만 있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ꡓ

 자신의 정치철학을 조심스럽게 내비치는 그는 혹시 정치에 입문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ꡐ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ꡑ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그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ꡐ뜻은 있으나 끝까지 안할 수도 있다ꡑ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지난 14대 국회의원 선거때 무소속으로 애드벌룬을 띄웠다가 진정한 주민대표로 일하기 어려운 현실정치의 메카니즘을 보며 등록이틀 전에 보류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어린시절 가난쪾질병으로 인한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신앙인이나 의료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지금은 비록 그와는 다른 길에서 한 출판사의 사장이 되어 있지만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하고, 남한테 베풀 여유가 있는 걸 감사하는, 또 근면쪾근검절약하며 늘 연구하는 중견지성인의 위치에 서 있다.

 기회가 된다면 고향 당진에서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좧실버산업좩을 해보고 싶다는 그는 부인 박영진(56세) 여사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는, 자식 잘키운 아버지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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