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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면 삼봉리 ‘이주민 할머니들’의 억척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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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맞게 힘들어두 당장 이거 안하면 병 날거여”, 공군사격장 건설로 고향 등지고 20여년 전 이주해 와

▲ 바닷물이 빠지지 않는 조금때는 함께 모여 굴까면서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50마지기 준다던 약속 오간데 없고 바다에만 의지해 살아온 험난한 인생역정
“정말 그 할머님들 열심히 사셔요. 아무리 추운날도 물때 되면 꼬박꼬박 바다에 나가고...하루도 헛되이 보내시는 분이 없어요. 요즈음 부동산투기다 뭐다해서 놀고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면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 분들이지요.”
석문 삼봉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한 주민의 말이다. 근방에서는 한결같이 ‘억척이’로 통하는 주인공들은 바로 보령 웅천의 바닷가에서 살다가 20여년 전 공군 비행사격장 건설로 삶터를 내어주고 삼봉으로 이주해 온 할머니들이다. 처음 이주해 올 당시 80여 가구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장성한 자녀들을 따라 외지로 나간 세대들도 있어 65가구 정도가 삼봉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하고많은 곳 중에 왜 충청도 서북단 끄트머리인 삼봉이었을까? 바로 대호간척지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에 의하면 당시 정부가 공군비행장을 건설한다며 다른 곳으로 이주를 요구했고 고향을 등지는 조건으로 내어주기로 약속한 것이 대호간척지였다. 할머니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세대당 50마지기씩 떼어주겠다던 약속은 오간데 없고 소금기 있는 간사지를 물을 퍼올려가며 고생고생하면서 쓸만한 논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나중에 이주민들 몫으로 돌아온 농지는 세대당 고작 2500평이었다고 한다. 논 2500평 갖고는 생활자체가 불가능했다. 정부의 약속 하나만 믿고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할머니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다였다. 어쩌면 그것은 고향을 떠나오면서부터 운명적으로 지워진 짐과 같은 것이었다.
설을 며칠 앞둔 23일. 바다일을 나가는 할머니들의 마실터라는 정연순 할머니 집에 몇몇분이 모였다. 전날 도비도 앞바다에 나가 캐왔다는 굴을 한다라씩 가지고 와 굴을 까면서 이런저런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 중이다. 물이 많이 차오르는 조금때라 오늘은 바다에 나가봐야 굴을 딸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만해두 젊고 이쁘단 소리 들었지. 40대였으니께. 20년 넘게 살아왔으니 이제 여기가 고향이야. 왜 노랫말두 있잖어.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세파에 찌들었다지만 아직도 곱상한 김숙희(78)할머니의 망향가다. 20여년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간 할머니들은 문을 열면  푸른 바닷물이 출렁였던 고향 웅천에서 백합이라 불리는 참조개를 채취하며 살던 때를 그린다.
“비행장 들어선다고 아야 소리 한번 못해보고 쫓겨난 거여.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방법있남? 처음 여기 올 때 눈물 콧물 다 뺐지. 자식들 얼추 키워놓고 기반잡고 살려나부다 했는데 고향뜨게 되었으니 맘이 어떠했겠어?”
“정부도 도둑놈이여. 논 50마지기 준다고 해서 왔더니.. 5년내내 간기 때문에 못자리 두세번씩 다시 해가믄서 힘들게 농사지어 놓으니 50마지기가 뭐여? 간신히 데모해서 차지한 게 2500평이야.”
할머니들의 생계터전은 숙명적으로 바다였는지 모른다. 고향에서도 그렇게 살았듯이. 할머니들의 직업은 ‘맨손어업’이다. 특별한 도구없이 손으로 하는 어업이라는 의미의 맨손어업. 아무 비빌 언덕 없는 이주민 할머니들의 처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다.
겨울엔 굴을 따고 봄부터 여름까지 바지락을 캔다. 오로지 기댈 것은 바다뿐이기에 할머니들은 바다에 나갈 때마다 물이 ‘달려 들어오기 전’ 하나라도 더 채취하려고 허기진 배를 채울 겨를도 없이 눈을 번쩍이며 굴을 딴다.
그렇게 따낸 굴을 짊어지고 나오는 일도 보통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한번 바다에 나갈때마다 채취하는 굴의 양은 껍질 째 40키로 정도. 웬만한 장정도 들기 어려운 무게다. 그짐을 들고 걸어 나오는 바닷길은 천리길이다. 진흙으로 맥줄이 된 할머니들을 맞아주는 건 멸시와 천대다.
“워낙 무거우니께 한번 내려놓으면 혼자선 다시 들쳐 맬 수가 없어서 등짐을 진 채로 쉬지. 간신히 매고 나와 버스를 타면 자리엔 앉지도 못하게 해. 차 버린다고. 어떨땐 손들어도 그냥지나가는 버스도 있고..”
‘우리 사는 게 5등 인생’이라며 혀끝을 차는 할머니들. 밤새워 깐 굴을 시장에 내다 팔러 나가면 텃새 때문에 굴통을 든 채로 너 댓번씩 쫓겨나고 노상에 앉아 찬 도시락을 먹어야 할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도 든다는 할머니들... 그렇게 사는게 ‘징글맞아서’자식들 따라 도회지에 나가면 정작 하루도 못 산다는 할머니들이다.
“내가 자식 따라 나갔다가 아파트 생활 답답해서 다시 내려왔다니까. 인제 내 손으로 밥 못해먹으면 몰라도 수족 움직일 수 있는 한 예서 살아야지.”
- 김숙희 할머니
할머니들이 파는 굴은 자연산 생굴이다. 바다만 온전히 보존된다면, 몸만 마음대로 움직여 준다면 하루 5-6만원 벌이는 할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들 중엔 팔순이 넘어서도 이 일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파는 굴이 비싼게 아녀. 어디가서 이런 굴 살 수 있간? 큰 양식굴하곤 비교가 안되게 맛있으니께.”
어리굴젓을 만들기도 하고 회무침으로도 먹고 굴밥, 무우국, 김치국, 미역국에도 넣으면 그만이라며 굴자랑하는 할머니들은 정작 자신들은 그렇게 좋은 굴을 먹지도 못한다고 한다.
“한 사발 팔면 얼만데 생각하면 아까워서 먹을 수가 없어. 이거 따느라고 힘들었던 생각해도 그렇고..”
고향떠나 억척스럽게 살아 온 삶, 골다공증에 관절염에 평생을 놀린 두 팔 두 다리가 성할리 없는 나이이지만 “이거 안하면 다 병든다”고 이구동성이다. 고뿔이 들었다가도 찬바닷바람 한번 쏘이면 달아난다는 할머니들의 무쇠같이 단단하고 강한 생활력은 찬 바닷바람과 험난한 이주민의 인생역정을 이겨 온 원동력이다.

섣달 그믐 할머니들의 새해 소망을 들어본다. 

“소망 많지. 건강한거, 돈 많이 벌어 집도 장만했으면 좋겠고 6남매 모두 잘 살면 더 바랄게 없지” -  정연순 할머니
“굳건한 믿음 주시고 건강하고 7남매 자손들 직장일 잘 하는거지. 모두 이뤄 주실 걸로 믿습니다.”  
- 김숙희 할머니
“건강하고 자손들 원하는 거 다 이뤄지고 손자손녀 공부 잘하는 거지요.”
 - 황애순 할머니
“막내아들 손자가 여섯 살 났는데 장애가 있어서 아직 걷지도, 말도 못해서 항상 마음에 걸려. 올핸 조금만이라도 건강해 졌으면 좋겠어”
- 최영희 할머니
“작년엔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 많았는데 올해는 7남매 자손들 다 잘되고 건강하길 바래.”
- 이순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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