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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오면 늘 국립현충원이 생각난다.
중학교 1학년 때 까까머리를 하고 어머니 손 붙잡고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었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는데 왜 그곳을 갔었는지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많은 인파들이 있던 기억으로 보아 현충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제 며칠 후면 대전 현충원으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 106 사병묘역에 계신 아버지, 비록 당신의 유골만을 모셨지만 당신의 며느리와 자손들을 데리고 가면 늘 말없이 반겨주시는 것 같다. 그 곳에 갈 때마다 까치가 가까운 묘비 앞에 앉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엔 아버지께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위해 전차를 타고 남대문 앞 미경사와 동네 보건소를 다니는 것은 나의 규칙적인 심부름 종목이었다.
또 성장해서는 쌀가마니를 자전거에 싣고 아버지를 대신해 배달하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아버지는 생전에 동생은 시키지 않으시고 유독 나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래도 나는 한마디 불평도 늘어놓지 않았었다 . 왜냐하면 동생은 사법고시 준비로 바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걱정만 안고 살다 가신 아버지! 이제는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영면하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진다. 현충원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비어 있던 땅들이 많은 유공자들의 묘소로 바뀌는 것을 보면 지금도 많은 분들이 조국을 위해 또는 공익을 위해 숨지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숙여진다.
내가 아버지와 그곳에 계신 분들과 똑같은 국가와 공익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곤 한다.
또한 자신만의 이익을 탐하며 부의 축적과 권력을 위해 남의 고통은 아랑곳않는 비정한 세상에 그래도 한 줄기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또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건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많은 호국 영령의 덕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삶의 자세 또한 건전하고 남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베푸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나의 책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송악고 교사  |  본지 편집위원
skyhoch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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