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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외길② 농민과 함께 40년, 이수 전 농수산과장

쌀을 위해, 땅을 위해, 농민을 위해 김태숙l승인2007.01.22 00:00l(6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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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농심(農心)으로 살다 퇴임한 당진출신 농업직 제1호 과장

공직생활 시작부터 끝까지 매일 농사일기 쓴 당진농업 산증인
일기 토대로 <당진쌀농사 30년> 집필해, 90년도 이후 일기 불타 증보판은 포기

 2006년 12월 정년을 마치고 퇴임한 이 수(63) 전 농수산과장은 이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많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공직에 40년 가까이 몸담은 많은 사람 중에서도 그는 오로지 농업ㆍ농민과 더불어 그 애환의 깊이를 더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 40년 사이에 진짜 농부의 매무새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나이 들어 있었던 사람이다.
 2007년 1월 중순 시내 모 식당에서 ‘과장님’을 만났다. 반가워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식당 주인도, 주방할머니도 과장님 과장님 살갑게 불렀다. 사연인 즉 간단했다. ‘쌀’에 관계되지 않은 식당이 있을 리 없고 당진에서 ‘쌀’에 관한 한 이 수 과장을 모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오랜 기간, 다니는 식당마다 ‘당진쌀’을 쓰자고 노래를 불렀으니 식당주인들 기억에 남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처지여서라기 보다 정년 후 급격히 바뀌었을 생활에 대한 단상이 어떠하신 지 알고싶어 안부부터 물었다. 이 수 과장은 ‘그간 일에서 온 부담과 강박관념이 컸었는지 일에서 손을 놓으니 편안하다’고 하였다. 오죽하면 그간 고생시키던 당뇨까지 저절로 나아지고 있다고. 우리사회의 격동기가 따로 없었던 전후(戰後) 50년 세월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냈고, 그것이 보릿고개부터 ‘세계화와 웰빙’시대까지 한국식량사의 격변과 파고(波高)를 현장의 농민들과 함께 억세게 겪어온 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싶었다.

1967년 1월1일 시작한 공직생활 군더더기 없이 40년

 1967년 1월1일 신평면에서 공직을 출발해 2007년 1월 1일 공직을 떠나 낯선 새해아침을 맞을 때까지 이 과장의 공직생활 40년 역사도 군더더기 없이 만 40년이다. 1945년 우강면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나 합덕농고 졸업 후 농업직 공무원시험을 거치며 공직생활은 시작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정식 근무 전 6개월 동안 고향인 우강면에서 일을 거들며 손에 익힐 기회도 있었다. 72년 7월 15일 본청 농산과로 옮겨온 후에는 92년 7월 보령으로 3개월 반 동안 나가있었던 때를 제외한 전 기간을 오로지 고향땅 농사터와 고향농민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았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기울였던 피나는 노력과 농업구조조정 등 농업정책에 크고작은 변화가 있을 때마다 생존권이 걸린 농민의 투쟁을 일선에서 막아야했던 어려움, 또한 그들과 대치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고뇌. 이런 것들로 점철된 그의 공직생활은 가난과 땅과 농민과 그들의 땀에 뒤범벅되어 고단하고 힘겨웠다. 그러나 종종 입장과 처지는 달라도 늘 농민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은 변함없었다. 농정을 반대하여 싸우는 농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농민행사와 시위에 동행하였고, 버스 다섯 대 이상이 움직이는 상경시위에도 늘 함께했다. 그런 날에는 마지막 한사람의 신변안전까지 확인한 후에야 밤늦게 귀가하곤 하였다. 그런데 늘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돌아보니 왜 이렇게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지, 힘겨워하던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좀 더 따뜻이 대해 줄 걸 하는 생각에 이 사장은 가슴이 아리다.   

농민에 대한 애착과 농민단체와의 끈끈한 유대
 
 쌀과 관련해 잊혀 지지 않는 일이 하나 더 있다. 95년 정미면 수당리 주민들의 공원묘지 반대운동이 그것. 당시 주민들의 반대운동은 얼마나 광범위하고 강력했는지 64ha에 걸친 마을 논 전체에 대해 모내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하루하루 날이 가고 논은 말라가도 머리띠를 동여맨 주민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이때 누구보다 애간장이 타들어갔던 사람은 바로 이 과장이었다. 그들의 심정은 알고도 남지만 농사를 포기하면 다음해 어떻게 먹고 살 지,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 지친 이 과장은 극비리에 초대형급 프로젝트를 감행하였다. 밤에 주민들 몰래 논에다 물을 대고, 주민들 몰래 키운 모를 초대형 트럭으로 수차례 나르고 군부대까지 동원하여 모를 심었다. 이때 농민회와 농어민후계자 등 군내 농민단체 회원 수백명이 형제의 고통을 대신해 땀을 흘려주었다. 모를 심고 나서도 주민들과의 충돌은 격렬했지만 땅과 곡식 앞에서 약한 것이 농심이었다. 가까스로 공원묘지 입주 반대에 성공한 이 마을 주민들은 그토록 싸웠던 이 과장에게 후에 ‘감사패’로 고마움을 전했다. 농민과 자신의 일에 대한 끝없는 애착, 그리고 때때로 첨예한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했던 농민단체들과의 끈끈한 유대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40년간 고생한 만큼 가슴벅찬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역이 있었다. 그것은 농업직으로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오래 계장을 달고 있어도 승진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평직원 생활 6년 후 계장에 올랐지만 그 자리에서 자그마치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도청에서 승진해온 행정직 과장들이 계속해서 머물다 갔다. 농업직 후배들에게도 길이 없다는 징표로 보이는 것 같아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많은 농업직들이 처하는 어려움 중 하나였다.

20년간 써온 일기 토대로 <당진쌀농사 30년사> 집필
 
 이 과장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는 필요할 때면 마다않고 깜깜한 군청 서고(書庫)에 들어가 분류하고 정리해놓은 농사관련 통계와 공문, 사업계획서들이 풍부하게 있었다. 늘 농업관련 사료부족을 겪어온 이 과장은 이 기회에 후대를 위해서라도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공직생활 시작부터 매일 정리해놓은 일기가 있었다. 매일매일의 날씨와 작황, 농산물가격, 생산량, 식량증산 계획과 결과, 쌀에 관한 간부회의와 부서회의 기록 등이 커다란 노트 한권에 1년에 걸쳐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런 1년 역사가 해마다 정리돼 1987년 당시에 무려 20권에 달해 있었다. 업무 외에 틈나는 대로 정리했더니 책 한권의 분량이 되었다. 이 과장은 책을 펴내기로 하고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을까 하여 군수실을 찾아갔다. 당시 구장회군수는 한참 원고를 뒤적이더니 무릎을 탁 치며 ‘이걸 나에게 양보하게. 이것을 당진군 사업으로 편찬하기로 하세. 대신 집필자는 이계장 이름으로 하고 말일세’ 라고 권했다. 이리하여 1960년 당진군이 편찬한 <당진쌀농사 30년>이라는 책은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인생사 세옹지마라고 했다. 승진에 대한 부담을 비우고 책을 편찬하고 나니 보령으로 멀리 발령까지 났다. 그러나 3개월 뒤 이 과장은 뜻하지 않게 당진으로 다시 오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당진출신 농업직 제1호 과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06년 12월, 이 과장은 직원송별회에 농민단체 회원들까지 대거 참석한 가운데 뜨거운 축하를 받으며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너무 고맙고 행복해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어린시절 이후 아주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이 과장은 농민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마음 뿐이다.

지난 여름 자택화재로 17년간 써온 일기 불타

 하지만 이 마당에 차마 달래기 어려운 아픔이 하나 있다. 지난해 여름, 낡은 자택에 불이 나면서 소중한 물건들이 모두 타버린 것이다. 대통령표창을 비롯한 표창패와 농민들이 마음을 담아서 준 감사패들, 심지어 당진쌀농사 증보판을 내려고 1990년 이후 또다시 매일 써온 일기와 모아둔 자료, 책들까지 모두 흔적없이 타버렸다. 자신의 발자취와 자신의 남은 소명이라 여겼던 일의 자료를 모두 잃어버린 충격은 그날 이후 3개월 동안 이 과장을 힘들게 하였다. 주변에서 이 속내를 아는 사람들도 안타까워 하긴 마찬가지였다.
 아픈 마음 뒤로 하고 이 과장은 요사이 아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불타버린 집 대신 새 보금자리를 짓는데 그것을 40년간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아내에 대한 선물로 생각하고 정성을 들이고 있다. 같은 공무원으로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한 원종숙 여사는 사실은 당진 1호 여성공무원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둔 것이었다.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과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태숙  tskim@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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