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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외길3 당진에서 다섯번째 개인전 준비, 조각가 배 효 남

자연과 문명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 배효남 김태숙l승인2007.01.29 00:00l(6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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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 문명, 양자택일 앞에 서있던 고뇌는 올겨울 개인전에서 서로 ‘조우’하게 된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조각을 모르는 사람도 로댕을 안다. 근대조각의 시조로 불리는 로댕은 1840년에 태어나 한 시대를 살다 가버렸지만 그 명성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도도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명성도 자신의 작품보다 약했다. 미처 로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며 그가 어떤 형상을 통해 심어준 인상은 백마디의 말보다 강렬하고 심지어 영원하다.  

조각가 배효남(41)은 생각한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존재들도 언제나 깊은 상념에 잠겨있다. 「깊은 것에 잠겨있음」. 관객으로서 그의 작품을 통해 내가 읽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보이는 것을 더 보고자 함. 아는 것을 더 알고자 함. 섣불리 이것이다 라고 진술하지 않음. 언제나 양면성을 담고있고 세계를 미완의 상태, 미지의 상태, 진행중인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갖는 미덕인 것 같다.

불교의 성인들이 말하는, 삶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열린 통찰은 ‘나는 모른다’이다. 기독교에서도 모든 것은 ‘목자(牧者)이신 주(主)’만이 알고있다. 우리는 미지의 일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것은 다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함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미지의 새로운 순간에 내던져진다. 완전함은 없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순간, 순간에 대한 인식 속에만 존재한다. 실상은 불완전과 무지의 연속적인 과정일 뿐이다. 배효남의 모든 작품이 무언(無言) 중에 담고 있는 육중한 고뇌는, 내가 볼 때 바로 이런 것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의 통찰이다. 세상의 작가는 과연 무엇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작가일 수 있는가. 이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양면성, 그 굴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작가는 불완전의 역동성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로댕이라는 세기의 조각가가 두고두고 존경받는 이유는 종교 혹은 신분, 의뢰인의 주문이라는 종전의 한계를 뛰어넘어 조각작품 속에 사랑과 욕망, 분노 등 순수한 개인의 차원을 구현하여 동시대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위대한 작가란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 아닐까? 본원적인 것이 아니면서, 참된 것이 아니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허위의식 같은 것을 깨고 시대를 훌쩍 뛰어넘는 사람?

작가 배효남은 일단 이 생각에 긍정한다. 그러나 두가지 면에서 이에 대해 우려한다. 하나는 한국처럼 강박관념이 강한 사회에서 그런 관점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강박적인 경향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다. 이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미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다. 새로운 것은 (무조건) 위대하다는 풍조는 위험천만하게 파괴를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새로움은 자극이나 쇼킹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장인들이 발견하는 새로움과 어떤 외향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새로움은 다르겠지요.” 배효남의 말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의지 아래 주제의식에 치우쳐서 작품을 만들 경우 작품의 진정성(眞情性)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말한다. “어떤 환경 속에서 직접 체험된 것이 아니라면 작가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진정성은 바로 작가 자신의 치열한 경험과 그속에서 얻어지는 섬광같은 통찰에 의해 자연히 달성되는 것이다. “작업 자체가 하나의 수양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대적인 것, 새로운 것을 서구적인 것과 동일시하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동양적인 것이 그 원류입니다.”  

배효남은 문명(文明)의 이기(利機)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가난한 어린시절, 장난감을 살 수 없어 낫으로 나무총을 깎아 만들었던 경험이 그의 첫 조작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을 ‘촌놈’이라 부른다. 그가 알기로 문명의 첨단을 걷는 기기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와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인터넷과 같은 정보네트워크 시스템은 미국의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문명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과 거부의식이 깔려있다. 이것이 3회 개인전까지 그의 주제를 이루었다면 2005년 네 번째 개인전에서는 자연과 문명 속에 방황하는 인간이 다루어졌다. 자연과 문명은 어느 한 쪽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비판 자체는 어떤 것도 건설하지 못한다. 그 가운데 지금의 인간이 있다. 4회 전시회의 테마는 <선택과 조화>였다. 그때 출품했던 작품 “양자택일”은 배효남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2007년 배효남은 당진문예의전당 야외와 실내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처음 고향에서 갖는 개인전이다. 3회 전시는 세종문화회관에서, 4회 전시는 인사아트센터에서 열었었다. 머릿 속에서 작업구상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생각하는 테마는 <조우(調遇)>, 즉 만남ㆍ화합이다. ‘양자택일’앞에 서있던 분리와 고뇌는 비로소 ‘조우’라는 대단원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불현듯 작가 까뮈의 말이 떠오른다.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확장이다」. 시대와 나라는 달라도 동일한 작가들의 사색은 그들이 길 위에서 헤매고 고뇌하고 쓰러지고 울고 몇 번쯤 죽은 뒤에 얻은 한모금의 맑은 샘물일지 모른다.     
    
그동안 목원대와 성신여대에서 강의해왔던 그는 올해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될 예정이다. 분야는 다름아닌 해부학. 인체의 균형과 미학은 해부학이라는 정밀한 단계를 거치며 온전해진다. 현재 소조각회 회원이기도 하며 최근 구상조각회 임원을 맡아달라는 제안도 받았다. 이런 일들은 작가에게 어려운 선택을 요구한다. 한참 작업에 몰두해있을 시기에는 모든 것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비라도 벌어야 하고 미술계 중견의 책임을 묻는 주변요청을 묵살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조각을 현실에 응용하는 한편 재료비 수입원이 되어주는 것은 조형물 작업이다. 그는 부평 역사박물관과 김천시 종합운동장 조형물 등에 이어 당진의 윤곤강 시비, 왜목마을 이근배시인 시비 등을 만들었고 요사이 당진 ㄷ 아파트 조형물 작업을 하고 있다.  

배효남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세 사람은 어머니와 지난해 결혼한 조각가 아내와 먼저 세상을 뜬 조각가 친구 구본주다. 배효남에게 친구 구본주는 훌륭한 작가의 표본이었다. 일찍 자기세계를 세우고 거기에 충실하게 작업을 했다. 그는 이 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오늘도 천천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다. 사물의 한 면에 천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넓은 구도와 거대한 스케일을 가질 수밖에 없는 배효남의 작품들. 오늘도 그의 깊은 상념 속에서는 구상단계인 새로운 작품이 태중의 아이가 그러하듯 부지런히 세포분열을 하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빛’과 빛의 다른 면인 ‘그늘’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드리운 그늘도 가끔 들여다 보면서.        
 


* 1967년 당진출생 / 고산초ㆍ당진중ㆍ호서고ㆍ홍익대 조소과ㆍ성신여대 미술대학원 조소과  졸업 / 제1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조각부문 우수상 수상 등
* 주소: 당진군 고대면 성산리 2구 440번지 / 353-6837


김태숙  tskim@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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