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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사진
  • 입력 2007.02.05 00:00
  • 수정 2017.08.14 05:58
  • 호수 648

조창희 우강면번영회장
"젊음이 넘쳤던 농촌, 친구, 그리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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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사진

 첫 번째 사진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돌아다녔던 20살 무렵, 우강면 창리의 ‘옷밥골’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친구들과 찍은 것이다. 뒷줄 맨 오른쪽의 청재킷을 입은 이가 나다. 그 앞에 하얀 옷에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청년은 김화묵, 그 왼쪽이 오세철, 그 왼쪽의 선글라스를 쓴 이가 우승재다. 다들 어렵게 살았지만 20살의 우리들은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사진 찍기를 즐겼다.
엄혹한 정치상황과 절대빈곤에 시달렸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늘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특히 당시 농촌에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희망도 있었다. 피 끓는 젊음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콩쿨대회도 개최하고 추석에 맞춰 내려온 같은 또래의 여성들과 함께 어울리며 청춘의 한 시기를 보냈다.

 두 번째 사진은 군에서 복무하고 있을 때인 1973년에 경기도 연천의 육군 28사단에서 철책선 근무를 하던 도중 위문공연을 온 연예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때 나는 중대 대표로 나가 흘러간 옛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지금 봐도 삐딱하게 쓴 모자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노래실력보다는 무대매너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 중대대표로 뽑힌 것 같다. 왼쪽에 있는 여가수는 지금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꽤 유명했다. 철책선에서 경계근무를 서다가 이 때 6개월만에 처음으로 여자를 구경한 우리들은 기쁜 마음에 평소의 끼를 마음껏 발휘했다.

 세 번째 사진은 1984년 경 아내 박봉임(51)과 충주호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동네사람들과 함께 한 여행에서 우리들은 유람선을 타고 단양팔경도 구경하며 모처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아내는 젊은 시절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평생 고생하며 내 뒷바라지를 했다. 제대로 된 세간 하나 없이 이불 하나만 갖고 출발했지만 아내는 불평 한번 안 했다. 거듭된 사업실패와 시련 속에서 이사를 28번이나 다녔는데도 싫은 소리는커녕 늘 따뜻한 격려로 큰 힘이 돼줬다. 아내야말로 내 인생의 일등공신이다.
정리 / 유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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