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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특집 ※ 보덕사 정안 스님-“사람들이 너무 바빠요, 그러면서도 늘 외롭고 불행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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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둘이 아니라는 인드라망의 생각과
탐진치(貪嗔痴)를 멈추려는 깨어있는 생각이 참 나를 밝혀줄 것

 석문면 삼화리 보덕포에는 전통사찰 ‘보덕사’가 있다.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던 보덕각시의 설화에 따라 보덕사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절은 보덕포가 보덕포라 불리게 된 연원이기도 했다. 보덕사는 3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찰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포구에 자리한 사찰답게 옆으로 펑퍼짐한 대신 아담한 몸체를 층층이 쌓아올려 바닷물과 하늘을 벗삼을 수 있도록 지어졌다. 네모 반듯하지도 않고 틀이 있는 듯 없다가 없는 듯이 있는 이 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고목과 바위들을 그대로 품은 채 서 있다. 그래서 계단을 두어층 올라 주변 풍광을 바라보면 바닷물 위에 떠있는 커다란 고목을 타고 올라선 듯 천연덕스러운 평화와 무량한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보덕사 정안(正眼)스님이 해인사를 거쳐 이곳 보덕사로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일이다. 삼십 중반에 오셨으니 이제 스님은 이순(耳順)을 맞이했다. 스님이 오시던 1980년만 해도 이곳 보덕포에는 배들이 오갔고 주변에는 공장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인심이 좋았다. 한없이 평화로운 가운데 그저 아침나절에 절 문턱까지 차올랐던 물이 한낮에는 저만큼 물러났다가 또 언제 보면 턱까지 차있곤 해서 시시각각 시간의 변화와 흐름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덕포에는 배들이 다니지 않는다. 대신 육로를 통해 커다란 공사차량과 철제품들을 실은 대형트럭들이 다니고 석문면 주변을 휩쓸고 간 해안매립과 보상의 몸살 속에서 인심도 사나워졌다. 사람들은 정작 눈떠야할 인드라망*과 참된 자기 대신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눈을 떴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의 맑은 얼굴만이 변함없이 세월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스님은 수년전, 다른 몇분의 목사님, 신부님들과 번갈아 당진시대에 종교칼럼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 있었던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결사 전국탁발순례행사에도 우연히 함께 참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제가 요즘 많이 생각하는 문제는 사람들의 정신적 빈곤과 고갈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외형적인 성공을 위해 허겁지겁 살고 있지요. 늘 무언가에 쫓기고 무언가에 매여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새가 없고 정작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성찰할 여유가 없어요. 과연 요즘 사람들 가운데 누가 의연하게 홀로 있을 수 있을까요? 혼자 조용히 있다보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상에서 소외된 것처럼 여기지요. 정신적인 풍요와 기쁨, 행복의 원천이 바로 거기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바쁘지만 정신적으로는 모두가 빈곤하고 가난하지요.”

 스님은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총격사건을 떠올리며 그것이 우리 대다수 사람들이 안고 있는 정신적 빈곤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안타까워 예불과 기도를 올릴 때도 늘 거기에 지향을 두고 계신다고 했다. 스님은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의 빈곤이 바로 ‘분리’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신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서로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에서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감정, 잘못된 행동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된 정신의 빈곤을 풍요로 바꾸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먼저 바로잡아야 하는데 바른 견해의 출발점이 바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연기법, 즉 인드라망의 원리다. 스님은 얼마전 천성산 터널개통문제로 도룡뇽과 생태계를 대신해 정부와 필사의 싸움을 벌이다 목숨을 잃을 뻔한 지율스님에게도 존경의 마음을 갖고 계시다며 자연과 공존할 수 없는 산업, 자연과 공존할 수 없는 개발은 결국 인간성을 더욱 파괴할 것이라고 걱정하셨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표는 참된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냉철하게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의 주인이 나입니까? 다른 무엇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탐하는 마음, 어리서은 마음에 주인의 자리를 내주지는 않았습니까?”
 
 스님은 참자신을 찾는 길은 먼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탐진치(貪嗔痴)를 깨닫고 그것을 멈추려고 노력하는 일이라고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멈추어야 합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생각,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멈출 것을 멈추고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며 자각의 길을 나아가면 참된 나의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부처님의 대자비심이 저절로 발현됩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시다면 우리시대의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으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스님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편타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나 바른 눈으로 우리 존재의 실상을 바로보는 것입니다.”
 덤으로 몇가지 가르침을 적은 메모를 선물로 주셨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三日修心 千載寶   삼일수심 천재보
百年貪物 一朝塵   백년탐물 일조진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탐물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 되느니라
?조사스님의 말씀
 
나는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병을 알아 약을 주나니
먹고 먹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요
또 좋은 길잡이와 같아서 도로써 사람을 인도하나니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니라
-불교경전

사진/글 _ 김태숙

인드라망 : 불교의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하여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한다.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장엄한 무수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고 한다. 그물코마다의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되고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들에 투영되어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불교의 연기법, 연기적 세계관은 바로 이와 같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가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하나의 구슬들처럼 서로서로 그 빛을 주고 받으며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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