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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끝나고 돌아간다던 약속, 끝내 어머니께 지키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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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만의 고향방문 - ‘개성’ 방문길에 올랐던 합덕읍 박용모 어르신

“힘없는 늙은이 매일 기도하지
 이 민족의 허리 이어달라고 말이지”

 1950년 8월. 때는 6.25전쟁이 발발해 한 달여쯤 지난 시점이었다. 해방 후 단일민족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고 미소 양군에 의한 남북 분할점령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 바로 이남에 위치하게 된 개성시(開城市)는 남한의 어느 지역보다 먼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48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될 당시에도 이곳 개성은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군사분계선 이북의 맹렬한 기세와 도전을 가장 민감하게 느껴야 했던 곳이다.
 1950년 8월 당시 개성에 살고 있던 열아홉 소년 박용모는 남모를 고뇌에 잠겨 있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동의회 의원을 지내며 과수원을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박씨는 전쟁과 함께 도시와 마을이 순식간에 인민군의 수중에 장악되는 것을 보면서 집안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중대결심을 해야만 했다. 일정 때에도 면 유지를 지냈던 아버지와 당시 현직 경찰이었던 형의 신분이 인민군 점령 아래서 집안에 어떤 화를 불러올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형은 이미 도피길에 오른 뒤였다. ‘너의 가족들을 살리려면 네가 인민군에 자원입대하는 길밖에 없다.’ 조용히 귀띔해주던 친구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던 그 친구는 박씨와 정치적인 입장은 달랐지만 학교친구로서 진심으로 걱정과 충고를 해주었다. 결국 소년 박용모는 인민군 입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 곧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말고 기다리세요.”
 “용모야, 그런데 나는 어째 지금 네가 가면 다시는 못볼 것만 같구나.”
 소년 용모는 어머니의 걱정이 단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곧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 안심시켜 드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날 대문을 나선 그는 다시는 고향집에 돌아갈 수도, 어머니를 뵐 수도 없었다. 그가 살던 곳은 휴전과 더불어 휴전선 이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날 어머니의 볼에 흘러내리던 두 줄기의 눈물과 그분의 나직한 음성만이 소년 용모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날이 1950년 8월 3일이었다.

 2007년 6월1일, 합덕읍 운산리에 사는 백발의 노인 박용모(76)씨가 고향 개성땅을 밟았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지 실로 57년 만의 일이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당진군협의회가 개성을 방문하면서 함께 갈 민간인을 찾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방문을 신청한 것이다.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집디다. 내가 살던 개성은 당시만 해도 5대 도시 가운데 하나여서 번화한 곳이었는데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어. 개성시내로 접어들어서 선죽교를 지날 때는 어린시절 생각이 납디다. 어려서 나가 놀던 곳이었거든. 개성에도 커다란 남대문이 있었는데 그것도 흔적이 없고... 얼마나 가슴이 메어지던지...”
 그리운 가족을 만나는 일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사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고향을 떠나올 때 개성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셋이 있었다. 안내를 맡은 그곳 경비원에게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사는지 알 수 있느냐고 묻자 경비원은 ‘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나마나한 대답을 했다. 그래도 그들의 유연해 보이는 모습과 어르신이 건네는 사탕봉지를 거부감없이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못내 안심이 되었다.  
 개성을 방문하고 돌아온 감회는 착잡하고 가슴아팠다. 누구나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을 보며 회한에 젖게 마련이지만 파란만장하다 못해 전쟁과 생이별로 갈기갈기 찢어진 자신의 일생처럼 망가져 보이는 고향의 모습이 더욱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었다. 박용모씨의 일생은 비극의 조선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가족을 위해 인민군에 자원한 소년 용모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입대해 자칫 친일우익으로 낙인찍힐 뻔한 집안에 ‘의용군에 자원한 영웅적인’ 집안으로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판문점 근처 장단군의 한 전투에서 전쟁포로가 된 소년은 인천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소년이 겪은 수용소의 상황은 전쟁의 심장부처럼 잔혹하였다. 좌익과 우익 포로들 모두 자신의 캠프에서 대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낙인찍어 처단하였다. 후에 UN군의 자유심문을 거쳐 남한과 북한 중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곳을 적어내게 하여 격리 수용할 때까지 포로들 사이의 소리 없는 전쟁과 처형은 계속되었다. 남한을 희망하여 조기 석방된 소년은 얼마 후 다시 한국군으로 자원하였다. 전쟁 중에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동족상잔의 비이성적인 전쟁 중에 희망은 더더욱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민군에 가담했던 그가 남한에 안전하게 살기 위해 또 하나의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1953년 남과 북에 폐허만 남긴 채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맺어진 전쟁관련 협정은 정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이 아니라 휴전협정이었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휴식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 휴전선이 그어졌다. 전쟁 전 군사분계선 이남에 있던 박씨의 고향 개성은 휴전선 이북이 되어버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박씨는 돌아가겠다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걱정이려니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예언이었다. 어머니도, 아들도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57년전 대문앞에서 어머니가 흘렸던 눈물이 또 아들의 마음에 아프게 떠오른다.      
 “이런 생이별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우린 우리 민족의 운명을 똑바로 봐야 해.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미국과 소련이 분할통치하면서 남과 북이 갈렸어. 분단은 우리 민족이 원했던 게 결코 아니야. 그런데 왜 우리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이고 이렇게 서로 갈라놓아야 해.”
 격앙된 어르신의 말씀. 그러나 그분의 눈은 어느새 젖어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일찍 찾을 수 있었다. 어르신이 35년전 합덕에 터를 잡은 것도 아버지가 예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인민군에 쫓겼지만 어르신이 아는 아버지는 비겁하지 않았다. 열네살에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의열단을 따라 만주로 가다 붙잡혔던 아버지. 그분에게서 어르신은 ‘민족’이라는 강한 심지를 얻었다. 비록 시대의 풍랑에 떠밀렸고 합덕의 ‘개미사’라는 조그만 가게에서 카메라나 시계 따위를 취급하며 살았지만, 3남1녀 중 아들 둘을 사고와 병으로 잃고 가슴에 묻었지만 그 심지만은 잃지 않으려 애썼다. 인생의 많은 부침과 시행착오와 시련을 넘어서 신앙으로 마음을 다잡기까지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내 한평생 파란만장하게 살았지만 이제 와서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 민족이 통일되는 것, 그거 한가지 뿐이야. 그래서 힘없는 늙은이지만 매일 새벽기도를 하지. 이 민족의 동강난 허리, 부디 이어지게 해달라고 말이야.”
 어르신은 젊은이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신들 어깨에 이 민족이 있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돼. 민족의 화합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해. 이제는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민족을 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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