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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명물소개 ④ - 석문면 삼화리 보덕사] 바다 위의 절이 논 위의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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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의 모습. 나무에 절반쯤 가려져 있는 건물이 법당이다. 물이 들어왔을 때는 2층의 계단의 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문화유산들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장되고, 잊혀지고 또 없어지고 있다.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지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발굴해 보도함으로써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바다 위의 절, 이젠 산 위의 절
 석문면 삼화리의 환영철강(주) 인근에는 특이한 내력을 가진 절이 있다. 보덕포라는 지명에 따라 보덕사라고 불리고 있는 절. 보덕사는 창건연대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은데 보덕사가 있는 곳에 보덕사의 역사를 기록한 작은 비석에서 대략적인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비석에는 ‘호남사람인 혜행 스님이 1676년(조선 숙종2년)에 서해안을 보덕사를 지나다 부처님이 모셔진 의지처가 붕괴의 염려가 있고 요사채가 낡아 많은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중수했다’는 내용의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미뤄볼 때 보덕사는 최소한 1676년부터 요사채가 낡아 보수가 필요할 정도의 시기 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보덕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보덕사가 있던 지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래 이곳 보덕포는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있고 수심이 깊은 천해의 양항(良港)으로 육로교통이 미미하던 예전에 인천을 비롯해 오도항과 한진, 부리포 등의 항구와 내륙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이 보덕사에는 뱃사람들을 중심으로 먼길의 평안함을 비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1년 석문방조제가 조성되면서 바닷물이 없어지고 보덕사는 ‘바다 위의 절’에서 ‘산 위의 절’이 되었다. 보덕사는 현재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절벽 위에 법당이 자리잡고 있고 2층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있다. 1층에는 식당과 다용도 공간이 있는데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2층의 계단까지 들어 왔다고 한다, 물이 들어왔었다. 물이 들어올 때면 보덕사의 스님이나 신도들은 산을 돌아 절에 들어왔으며 물이 나갔을 때는 바닷길을 통해 외부로 나갔었다.

경관 빼어난 보덕포
 보덕사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에는 창건 연대 외에도 여러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비석에는 혜행스님이 뱃길을 따라 충남 서북부의 ‘서호(西湖)’ 지역을 지나면서 ‘이 지역이 산수가 아름답고 볼만한 곳이 많았는데 보덕포야말로 그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라고 칭찬했다는 구절도 있다. 혜행스님의 표현대로 보덕사의 앞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무엇보다 평야와 과거엔 섬이었던 자그마한 산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평안함을 준다.
 무엇보다 이 보덕사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보덕사 맞은편의 낮은 언덕에서 해가 뜨는데 매년 1월 1일 새벽 새해 법회를 열고 있다. 매년 1월1일이면 왜목마을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가 있는데 차가 밀려 왜목마을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새해 첫 일출을 보고 가곤 했다고 한다.
 
당진의 발전과 변화의 상징일 수도
 예부터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온 당진이지만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한 시기는 석문방조제와 대호방조제 등 두 방조제로 바다가 막히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바닷물이 끊기고 광활한 농경지로 바뀌면서 과거의 흔적은 서서히 없어져가고 있지만 보덕사는 당진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지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인터뷰 | 석문 보덕사 정안 주지스님
“보덕사에서도 일출 볼 수 있어”

 “보덕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덕사가 아직 바다 위에 있을 때인 1982년에 보덕사로 와서 25년간을 지낸 보덕사 정안 스님은 보덕사의 변화를 지켜보고 함께 했다. 스님이 처음 왔던 때만 해도 이곳 보덕포에는 배들이 오갔고 주변에는 공장이 전혀 없었다. 아침에는 절 문턱까지 물이 차올랐고 한낮에는 저만큼 물러났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시 턱까지 차있곤 했다.
 그러나 이제 보덕포에는 배들이 다니지 않는다. 대신 육로를 통해 인근 공장을 드나드는 커다란 공사차량과 철제품들을 실은 대형트럭들이 다니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개발에 보덕사가 휘말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1676년에 혜행 스님이 와서 보며 표현한 것처럼 보덕포의 수려한 경관은 군내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저 산 너머로 일출을 볼 수도 있습니다.”
 수려한 경관 위에 스님들이 공터마다 코스모스를 심어놓아 더욱 장관을 이룬다. 보덕사를 널리 알리려는 스님들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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