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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지역, 지역문화공간⑴] 독일 베를린

예술가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난 지역의 고건축물
150년 전설이 담긴 고색창연한 성(城) 베타니엔
김태숙l승인2007.11.12 00:00l(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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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공동취재 프로그램으로 기획한 <지역문화공간 다시보기-문화적 상상력이 지역을 바꾼다>는 무리한 해외취재 일정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현재를 과거와의 대화 속에서, 문화예술을 일상과 철학 사이에서 재발견하는 기회였다. 지역문화와 문화공간은 이미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일상적 상상력까지 지배하기에 우리에게 중요하다. 특히 문화공간은 그 기능 외에도 도시미학과 역사적 맥락 등을 통해 또다른 감동을 줄 수 있다. 비록 폐허라 하더라도 과거 위에다 현대의 실용과 미래의 첨단을 세우는 그들의 조심성과 정성스러움은 사실은 깊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예술성과 미래를 보장하는 열쇠였다. 그들 삶과 예술의 면면한 연속성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 질곡들과 뒤이은 개발주의로 그저 하릴없이 쓸려 내려가 버린 반만년의 우리 자취가 안타깝고 슬퍼진다. 영국과 독일의 사례를 독자들과 함께하고자 연재한다. 누군가 영감을 얻어 지금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면, 아니 상상할 수만 있어도 연재는 보람있을 것이다.         

세계의 젊은 예술가를 위한 체류 프로그램
 ‘베타니엔’은 독일의 베를린에 위치해 있는 국제적인 예술교류지원센터이다. 이곳에서는 국제미술계의 전문가가 추천한 전세계 젊은 예술가들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대개 그 작업들은 실험적인 성격의 것들이다. ‘레지던스(체류)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나라의 예술가를 소개하고 그들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는데 이 프로그램은 1년간 독일을 포함한 외국 작가들을 선정, 개별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작업과정을 개방해 작가 상호간의 교류를 촉진한다는 취지 아래 진행되고 있다. 25개의 스튜디오 가운데 현재 17명의 예술가가 상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빈 스튜디오는 전시를 위해 유동적으로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5년 김신일, 2006년 김윤호에 이어 2007년 현재 이문주씨가 참여 작가로 선정되어 체류중이다.

현대의 소프트웨어와 150년 된 건물의 조화
 ‘베타니엔’이라는 이름은 예수가 이스라엘 베타니엔 지역에서 사람들을 치료했다는 성서의 내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병원을 세울 때 붙여졌다. 예술가들이 예술로써 세상을 치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해서 후에까지 그냥 사용하게 되었다.
 국제적이라 하면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한 최첨단의 그 무엇을 연상하게 될 터이지만 이곳과의 만남은 바로 그러한 편견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1년을 가도 헷빛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은 독일 특유의 음울한 하늘 아래 ‘베타니엔’은 울창하게 우거진 마을 숲은 지난 곳에 낡고 색이 바래고 푸른 이끼가 뒤덮인 캐캐묵은 고성(古城)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성은 프러시아의 황제 빌헬름 4세가 1845년에 만들었다는 성이다.
 실험적 현대예술이라는 ‘베타니엔’의 체질과 150년간 그 자리에서 늙어온 고성의 얼굴. 이 상반되면서도 엄연한 공존에 잠시 소름이 돋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잃어버린 우리 옛것들이 전보다 더 그리워지리라.

과거의 영광과 굴욕 모두 상상력의 원천
 고색창연한 유럽문화의 오랜 전통과 유산, 그리고 전쟁, 분단, 통일로 이어지는 현대사적 소용돌이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오늘날 베를린은 현대미술과 문화의 중심으로 서서히 세계인의 고개를 돌리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이러한 극단적인 양면의 거침없는 공존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광이건 굴욕이건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그네들의 차가운 이성적 집념이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도 파란많고 역동적인 ‘역사와 인간 생태박물관’을 바로 이곳 베를린에 구현되도록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이곳에 펄펄 뛰는 예술가와 예술들이 모여들게 되는 건 아닌지.
 물론 영국도 그러하거니와 독일은 비록 사유재산이라 할지라도 세운지 일정시간이 지난 건축물들은 ‘문화재’로 당국에 등록되어 관리를 받기 때문에 함부로 헐 수 없을 뿐 아니라 유리창 하나라도 소유주 마음대로 바꿔 낄 수 없는 곳이다.  

60년대 청년들의 점거로 시작된 예술의집
 이 성의 역사는 베를린의 지난한 역사를 대신한다. 건축직후부터 병원건물로 이용된 이곳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베를린의 옛 영광이 끝나고 1961년 분단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병원건물 양쪽에 세워진 후 통일되는 1989년까지 그 비극의 온상이 된다. 병원건물은 분단의 경계선 바로 서쪽 즉, 서베를린에 위치했지만 철저히 봉쇄되었으며 이곳에서만도 동베를린에서 넘어오던 사람들이 최소한 150명 이상 죽었다. 1968년 병원 폐원 후 당국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 병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신문보도를 통해 발표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이에 몸으로 저항한 것은 바로 청년 예술가들이었다. 좌파 혹은 좌파지지자들이었던 100여명의 젊은이가 비어있는 병원건물을 점거하고 조직적인 반정부, 반냉전운동과 이 건물을 ‘예술의 집’으로 조성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기도 했으나 몇 년 후 베를린 시당국은 이들의 입주를 인정하게 된다. “Flower Power! (꽃의 힘!)" ”Make Love Not War! (전쟁이 아닌 사랑을!)" 등 당시의 슬로건은 그들의 이상을 상징한다. 이러한 사회참여의 전통은 아직도 이곳에서 계승되고 있는데 60년대 당시부터 지속되고 있는 ‘어린이음악학교’와 같은 사회교육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점거예술가들은 연극, 문학, 음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며 미래를 전망했다.  

작가발굴 시스템과 재원마련의 유연성
 ‘베타니엔’이 지금과 같은 국제미술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1975년. 이때부터 베타니엔은 미술을 매개로 한 국제교류의 대명사가 되었다. 베를린에는 당시 풍부한 예술자원이 있었으며 민간인 ‘헬렌’의 교류제안을 베를린시가 적극 받아들여 시행했다. 독일은 후에 이러한 교류와 소통을 더욱 확대, 국제 레지던스 아트센터 네트워크(Res Artis)를 창립하기에 이르며 이 협회는 미국의 창작실연합(AAC)과 더불어 국제적인 기구로 자리잡는다. 베타니엔의 국제적 명성은 이처럼 정부와 공공기관, 자치단체, 민간영역 모두의 협력의 결과였다.
 현재 베타니엔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한마디로 실험정신이다. 거주기간 1년동안 초대작가들은 월 1200유로(한화 150만원) 정도의 창작지원금을 받으며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한다. 단, 1년 후에는 마지막 과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작가는 약 850명. 그 가운데에는 ‘노만비스키(Norbert Biskys)'처럼 후에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한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서 특히 작가발굴시스템은 눈여겨볼 만하다. 7년 이상 프로페셔널한 작업을 해온 사람, 비엔날레 출전경험이 있는 작가, 작품성과 개성을 인정받은 사람 가운데 후원기관을 통해 입주하기도 하고 베타니엔이 직접 작가를 선정하기도 한다.
 작가발굴시스템은 스폰서 체계와도 관계가 있다. 이들에게는 베를린시의 재정 지원 말고도 후원해주는 비영리주식회사와 유네스코, 유로 같은 스폰서 그룹, 또한 한국의 ‘문화예술위원회’와 같은 협약기구들이 있다. 후원 및 협약단체와 후원기업들은 체류비용을 자신들이 대신 지불하는 조건으로 자국의 예술가들에게 이곳에 체류할 기회를 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문화예술위원회(전 한국문예진흥원)가 공모를 통하여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의 체류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문주씨를 비롯, 최근 3년간 이곳에 체류한 한국인 모두 그런 케이스였다.
 
당신의 지식을 테러하라
가까운 것들도 다시 보인다

 그 어떠한 자질보다 작가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작품생산의 결과보다 그 과정을 중시한다는 베타니엔. 그간 진행된 전시프로젝트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많았다. 보드카를 끓이는 장치를 설치작품으로 전시해 14일간의 전시기간동안 실제로 관객들과 보드카를 만들어 마셨던 루마니아 작가, 화가로 왔다가 결국 작곡가겸 디제이(DJ)가 된 미국작가, 바퀴벌레 경주와 그것을 담은 스크린을 작품으로 전시한 작가도 있었다. “실험적인 작품들은 대개 정치적인 성향을 띤다”고 이 시설의 국제교류책임자인 크리스토퍼 타냐트씨는 말한다.
 바야흐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고 지역의 터줏건물이 세계와 내통하는 베타니엔에서는 작가가 아니어도 자신이 지녀온 생각의 한쪽 물꼬가 왈칵 터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너덜너덜 떨어져 나간 기와와 반들반들 닳은 마룻바닥, 그곳의 남루했던 냄새들과 웅성거리는 추억들도 갑자기 알싸하게 그리워진다.

 

과거와 공존하는 미래, 세계와 소통하는 지역 두번째
 쿤스트하우스 타헬레스(Kunstlerhaus Tacheles) / 독일 베를린 미트


전위예술과 공동체를 실험한 젊은 그들, 타헬레스
도심복판에 100년 된 폐허, 자유를 꿈꾸는 도깨비집

 스쿠엇(Sguat)은 ‘무단 또는 불법점거’를 말한다. 과거 빈민들의 생존을 위한 빈집점거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라 유명해진 이 말은 뒤에 Art(예술)라는 꼬리가 붙으면서 이제 Sguart (Sguat +Art), 즉 ‘점거예술’ 또는 ‘예술적 점거’라는 예술양식의 한 분야를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오늘날 국제미술교류의 센터가 된 ‘베타니엔’의 토대가 된 것도 역시 1960년대 진보적 청년예술가들의 빈 병원 점거, 즉 스쿠엇(Sguart)이었다.  
 토지나 건축물에 대한 사유개념이 너무도 엄격한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공개념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일정기간 입주한 사람을 함부로 내쫓지 못하는 그들 나름의 사회문화적 토양이 있다 한다.
 독일 통일 후 동베를린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방치되어있던 건물이나 서독으로 망명하면서 버리고 간 빈집들이 지천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이런 빈집들을 무단점거해 대안적인 공동생활을 실험하거나 집단예술창작 공간으로 활용했다. ‘타헬레스’는 바로 당시 그런 활동에 나선 예술가집단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였다. ‘타헬레스’란 그들이 시도했던 모험과 이상이 과거의 사회적 통념을 산산이 부순 것처럼 ‘모든 것을 털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폐허에서 시작된 아트센터 타헬레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몇 달 뒤인 1990년 2월, 레오 콘다인 등 음악가가 주축을 이룬 예술가단체 ‘타헬레스’ 회원들은 소방차를 동원한 대규모 퍼포먼스를 벌이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의 한 건물을 ‘점거’했다. 그 건물은 1907년 대형 쇼핑센터로 건축되었으나 곧 파산한 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차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 채 폐허로 방치된 곳. 간간이 건물의 성한 부분만 이러저런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타헬레스의 점거로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집단거주촌이 만들어졌다. 회원들은 1층에 카페와 화랑, 2층에 극장과 공연장을 만들고 3, 4층의 나머지 공간들은 넓으면 전시장, 좁으면 작업실로 꾸며나갔다. 소문은 국경을 넘고넘어 전 세계에서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와 다양한 창작실험에 동참했다. 당시만 해도 인근에 까페나 화랑, 극장 등 문화시설이 전무했고 이들의 창작실험이 퍼포먼스, 콘서트, 전시, 조각, 설치 등 전 장르에 걸쳐 획기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타헬레스는 10년 사이에 곧 유명해졌다.
 당국의 철거압력에도 불구하고 타헬레스가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되어가자 정부는 결국 철거압력 대신 재정지원 쪽으로 선택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정부의 지원과 법적 권익을 보호받는 대신 타헬레스가 행여 재개발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긴 세월 싸움과 협상을 벌인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최초점거로부터 9년이 지난 1999년, 드디어 타헬레스는 정부의 지원과 함께 합법적인 입주권을 얻어냈다. 타헬레스에 입주하는 예술가들은 전기세 등의 관리비 명목으로 한 달에 우리 돈 12만원 정도만 지불하면 자기 작업실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도심의 건물 숲속에 100년 된 도깨비집
 점거 후 17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베를린의 비주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스쿠엇’의 단서로 여전히 이곳을 인용하고 이곳을 찾고 있다. 단체 이름에서 시작된 ‘타헬레스’는 이제 세계적으로 독특함을 자랑하는 그들의 아트센터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지은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되는 건물에 폭탄의 흔적마저 건물 안팎에 선연하여 이곳은 마치 도깨비집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더니 나선형으로 뺑뺑 둘러 올라가는 계단과 벽들은 온통 강한 원색톤의 커다란 낙서(그래피티)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것은 타헬레스 회원들의 작품이 아니라 오래 방치되는 동안, 혹은 이곳을 다녀가는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누대에 걸쳐 형성된 일종의 공동작업인 셈이었다.
 현재 타헬레스가 들어선 공간은 이 건물 3층과 4층이다. 30여개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스튜디오는 개인작업실과 공동 작업실로 나뉘어져 있으며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은 끊임없이 이뤄지지만 작업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철저하게 보호받는다”고 이곳을 안내한 타헬레스의 현 운영담당자 칼레드 케하우(Khaled KehaWi)씨가 말했다. 그 사이 건물의 일부가 무너질 위험에 처해 일부는 헐고 일부는 개인자산가가 새로 지어 이어놓은 상태였다. 타헬레스는 24시간 개방돼 있고 건물 1, 2층의 다른 세입자들도 밤 8시까지는 문을 열고있어 관광객들은 어렵지 않게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기로에 선, 혹은 외줄 위에 선 타헬레스
 운영담당자에 따르면 현재 타헬레스에서는 회화를 중심으로 음악, 조각, 설치, 의상 등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주로 ‘작가 교환프로그램’에 의해 러시아, 칠레 등 외국에서 온 작가들이다. 한국인 작가도 두명이 있으나 그 가운데 독일 작가는 없다. 이들은 대개 계약에 따라 6개월을 상주하고 기간을 연장하기도 한다.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아서 연간 100~200명이 신청을 하며 갤러리, 공연장 응모까지 하면 1000명 가량 된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싼 집값과 세계 여러 작가와의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
 작가를 포함한 입주자에게 싼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타헬레스가 공동체로 등록되어 세금감면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건물의 운영비는 1, 2층 상가의 임대료와 얼마 안되는 스튜디오 세입으로 충당하지만 이곳의 모토가 자기것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어서 작가들은 지원받은 금액을 스스로 기부하기도 하고 스튜디오와 연계된 조그만 샵(shop)에서 얻는 작품판매수익과 공모 수익으로 부족한 재정을 해결한다고 한다.
 내년이면 타헬레스는 민간중개업자를 통해 1999년에 체결한 10년 거주 계약기간을 만료하게 된다. 이말을 전하는 안내자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드높은 명성, 그러나 그곳이 지닌 양면성
 왠지 타헬레스는 기로에 서있는 느낌이다. 과거 동독 땅이었던 일대는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위상에 걸맞게 재개발의 열기가 뜨거운데 그 구조적인 힘 앞에서 100년의 폐허를 지키려는 이들의 전투력과 의지는 한없이 약해 보인다. 그들의 창백함을 보며 타헬레스의 창시자인 레오 콘다인을 비롯한 초창기 예술전사들이 왜 이 무한자유의 낙원을 등지고 떠났을까를 생각해본다. 어떤 작가들은 타헬레스의 명성에 힘입어 성공의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훌훌 털고 떠났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창기 멤버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공동체였다고 한다. 점거 초기 그들의 정신은 사회와 소통하며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진보적인 예술을 갈망했지만 입주한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그런 정신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예술과 공동체가 결합된 낙원을 꿈꾸던 전사와 수호자들은 떠나고 그들이 가꿔놓은 터전 위에 예술적 고민에 싸인 고립된 개인들만이 남은 것일까. 그것은 타헬레스의 변질일까 운명일까. 과연 타헬레스는 실패했을까. 국제아트센터로 여전히 외국 작가의 동경의 대상인 타헬레스에 대해 아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곳이 반감과 매력, 긍정과 부정, 혼돈과 자유, 그 극단 사이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이뤄졌습니다.


김태숙  tskim@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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