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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전설을 찾아서 ② ‘영웅바위’ 한진리] 바위에 간직한 평야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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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오래 전부터 각 마을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물에 얽힌 이야기,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얽힌 사연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전설이나 설화를 담고 있는 향토문화자원들이 더 이상 설화의 대상이 아닌 그저 개발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해 8회에 걸친 ‘우리 지역의 전설’ 1차 연재에 이어 제2차 기획취재를 통해 지역 향토문화의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과거보러 가는 길목
한진포구는 예로부터 당진 이남의 지역민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거나 경기도 땅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너가는 지름길의 길목이었다.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나 삽교천 방조제 건설 등으로 도로여건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이나 경기도 등 수도권을 가려면 예산을 거쳐 천안이나 평택쪽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처럼 나그네들의 길목이었던 한진포구 앞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돌섬이 있다. 이 돌섬을 한진리 주민들은 영바위라고 부른다. 당진군의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웅바위라고도 한다.
썰물때가 되면 넓은 갯벌과 바위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옛부터 이곳 한진리 어부들과 어촌주민들은 이곳 영바위에서 굴과 바지락을 캐왔다. 한진포구 주민들은 이곳에서 캔 굴과 바지락을 시장에 내다팔거나 쌀을 사기도 했다. 어부들은 영바위를 지표삼아 배를 몰았고 그들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존재가 영바위이기도 했다.

토정 이지함과 영웅바위
한진리 주민들이 영바위라고 부르는 영웅바위는 그 모양새가 힘센 장사가 주먹을 불끈쥐고 서 있는 것 같다해서 장사바위 또는 영웅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웅바위는 경기도 평택과 당진의 바다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 선조때 아산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과 얽힌 옛이야기가 있다.
당시 이지함은 아산 현감으로 있으면서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해 흉년에 극빈자를 수용하는 등 기민(飢民) 구제 정책을 펼쳤다. 하루는 저녁밥상을 치우고 하늘을 바라보니 다음날 점심때 큰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이지함은 마을사람들에게 큰 비가 내리니 피하라고 소리치고 다녔으나 마을사람 모두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던 이지함은 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한 사내와 마주쳤는데 그 사내가 ‘제 발등의 불도 못끄는 주제에 남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다닌다’고 말하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지함은 보통 사내가 아님을 깨닫고 그를 불러세웠으나 그는 빠르게 사라졌다. 이지함은 그를 쫓아 갔지만 그럴수록 그의 발걸음도 빨라져 잡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그가 욕설을 퍼붓자 사내가 멈춰서더니 화를 내며 “천지개벽으로 네 발밑의 땅이 갈라지는 것을 보지도 못하느냐”며 “이 근처가 바다가 되니 귀찮게 굴지 말고 피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순간 땅이 무너지고 갈라지면서 정신을 잃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이지함은 기름졌던 평택평야가 두동강이가 나 바닷물에 잠긴 채 바다 한가운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지함이 앉아 탄식을 하던 곳이 한이 맺혀 생긴 포구라 해서 한나루라 불리웠고 지금의 한진포구다. 또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던 이 바위는 강물을 지킨다고 해서 장사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에는 이지함과의 얽힌 전설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쳐들어올 때 그들을 놀라게 해 도망치게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진리에 남겨진 기억들
한진리에서 50여년을 살아왔다는 장영자(70)씨는 “바닷물이 빠진 날 영바위에 나가 바지락이며 굴을 캐다 팔곤했다”며 “지금은 바지락이나 굴의 양이 줄어들어 예전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옛날 어른들이 궂은 날이면 영바위에 무지개와 함께 대궐같은 대가집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했다”며 “우뚝 솟아 있는 바위가 옛날 그 대가집의 장독이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태안앞바다의 기름유출사고로 이곳 한진리도 간접피해를 입었다.
겨울철이면 어민들은 바지락과 굴을 팔아 겨울을 지냈지만 기름유출사고 이후 관광객의 수가 감소하고 바지락과 굴은 팔리지 않아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사고 이후 4개월여가 지난 지금은 그래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해산물을 찾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영자씨는 “아직도 기름피해의 영향이 남아 있다”며 “하루빨리 회복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70년 우정 간직한 두 친구 김순환·김영진씨

지난 70여년간을 한진리에서 살아온 김순환(74)·김영진(78)씨. 한진리에서 나고 자란 김순환씨와 8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한진포구로 이사왔다는 김영진씨는 비록 나이차이가 있지만 절친한 벗이자 의형제 같은 사이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한진리에서 살아오며 젊었을 때에는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며 한 평생을 한진포구와 함께 살아왔다.
영웅바위에 대해 물어보자 김영진씨는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한진포구 앞바다가 예전에는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는 말이 있다”며 “실제로 서해대교 교각 건설현장의 바다 바닥에서 갯벌흙이 아닌 육지의 흙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영바위(영웅바위) 인근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요즘에는 어족량이 줄어들고 조업도 어렵다”며 “주변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썰물 때 마을주민들과 함께 영바위로 나가 바지락도 캐고 굴도 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지금도 포구 주민들이 바지락과 굴을 캐러가지만 예전만은 못하다”고 말했다.
김순환씨는 “한참 고기가 많이 잡힐때에는 준치며 도다리, 민어와 삼치 등이 많이 잡혔고 특히 삼치가 유명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며 아쉬워했다. 또 “어렸을 때에는 조그만 어촌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산업화가 되고 주변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한진포구도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며 “마을의 인심도 점점 각박해져가는 것만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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