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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입력 2008.04.28 00:00
  • 호수 708

[우리고장의 전설을 찾아서 ③ 당진읍 ‘북창포’와 ‘채운교’ ]- 후덕한 인심의 채운아가씨 ‘채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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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오래 전부터 각 마을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들이 있다. 우물에 얽힌 이야기,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얽힌 사연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전설이나 설화를 담고 있는 향토문화자원들이 개발의 와중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져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해 8회에 걸친 ‘우리 지역의 전설’ 1차 연재에 이어 제2차 기획취재를 통해 지역의 전설을 찾아  향토문화의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북창은 닫혔는가
당암 김진오

좋은 포구(浦口)였는데
조수(潮水) 자유로이 드나들제
밀물에 기적이 울면
깃발올린 황포에 갈매기 날고
출렁대는 뱃머리 닻을 주며는

선창은 벌써 손마중 수술렁 대고
제물포 문물(文物)은 물참따라 묻혀들여
유정무정 사연들 무르익으면
비린내 섞여 거드름 대던
채운(彩雲)의 멋이여!

오섬(鰲島)의 어리(漁里)가 있어
사둘 쪽대 부게 짊어지면
마음은 수평선위에 흰구름 일고
숭어, 조기, 준치, 새우젓들
참 풍성했는데......

이젠 북창포 바다호흡 멎었으나
드넓은 여미들 뱃길 막히어
북창에 뱃고동 소리 들릴 길 없고
기웃둥 노젓는 정취 뱃노래 사뭇 아쉬워
내 저린 가슴
간삭은 석등(石燈)에 불을 밝힌다.

번창했던 북창의 기억
좥북창에 황포돛배 수십척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배들은 깃발을 나부끼며 저마다 한배 가득 물건을 싣고 순서가 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선창에서는 인부들이 상선이 싣고 온 짐들을 내리고 있다. 상인들은 마차에 짐을 싣느라 정신이 없고 주막에서는 그동안의 피로를 달래려 막걸리 한잔 하는 선원들과 뛰노는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선창은 한동안 북적였다.
선창 한쪽 물가에서 물질을 하던 아이들이 선창에 가득한 물건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즐거워 하고 있다.좦

석문방조제 물막이 공사와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이전인 1950~60년대 당진의 대표적인 포구였던 북창포의 풍경이다. 바로 지금의 당진읍 우두3리, 채운리다.
그러나 당진의 대표적인 포구로 알려졌던 북창포는 지금은 하천으로 변해버려 예전의 모습은 볼수 없었다. 아니 이곳이 과거 당진의 대표적인 포구였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3대째 이곳 북창포에서 살고 있다는 김창덕(75, 우두3리, 사진) 노인회장은 북창포 선창을 따라 길게 줄지어 서있던 황포돛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뒷산에는 학들이 내려앉아 있었고 선창에는 생필품을 실은 배들이 물건을 내리거나 벼를 실은 배와 땔감을 실은 배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훤하네 그려. 그땐 참 활기찼는데 말여.”
채운교와 북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조그만 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그는 “조기며 새우젓 등 생선을 실은 어선들도 많았다”며 “배들은 먼 바다로 나가지 전에 당산에 올라 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북창의 대표적인 선주였던 김기선씨의 자손인 전 축협조합장 김영태(78)씨는 “선친께서 벼 천여섬씩 싣고 인천으로 출항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며 “배가 선창에 들어서는 날이면 인부 30~40여명이 짐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채운교 인근에서 만난 김영태씨는 “일제시대때 간척사업을 통해 채운평야가 형성됐다”며 “채운평야에 학들이 내려앉아 운학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북창의 뒷산에는 학들이 때를 지어 있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상선뿐 아니라 숭어나 조기, 준치와 새우젓 등 각종 해산물을 가득 실은 배들도 드나들었지. 그때는 참 활기찼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볼수 없으니 아쉬울 뿐이네”

상인들을 위해 다리 세운 채운아가씨
이처럼 번창했던 북창포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당진읍과 고대면을 잇는 채운교에 대한 이야기다.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채운교는 당시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마차 한대 지나갈 정도의 폭이 좁은 다리였다고 한다.
현재의 채운교의 명칭에 유래가 된 또 다른 채운교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그 옛날 이 곳에는 채운이라는 아가씨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바닷가에서 당나라로 떠나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마음씨 착한 채운은 늘 상인들에게 넉넉하게 대접하며 덕을 베풀었다. 하루는 당진에 사는 대상인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죽은 상인은 재판을 받기위해 옥황상제 앞에 앉았는데 옥황상제가 말하기를 “채운의 덕미(식사때 정량 이상으로 후한 대접을 한 쌀)가 수백석인데 채운이 올날이 아직 멀었으니 그 쌀을 돌려쓰고 환생한 후 직접 그녀에게 갚아 준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니 상인은 굳게 약속하고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상인의 장례준비를 하며 모여 곡을 하던 집안 식구들은 놀라며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상황을 설명하고 창고를 열어 채운에게 쌀을 갚았다. 그러나 채운은 그 쌀로 상인들이 불편해 하는 냇가에 다리를 놓으니 사람들이 그다리를 일컬어 채운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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