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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입력 2008.05.26 00:00
  • 호수 712

[우리고장의 전설을 찾아서 ⑥ ‘삼형제바위’] 합덕읍 운곡리 - 삼형제가 잃어버린 어머니를 기다리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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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덕읍 운곡리 봉호산에 있는 삼형제 바위.

편집자 주
오래 전부터 각 마을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들이 있다. 우물에 얽힌 이야기,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얽힌 사연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전설이나 설화를 담고 있는 향토문화자원들이 개발의 와중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져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해 8회에 걸친 ‘우리 지역의 전설’ 1차 연재에 이어 제2차 기획취재를 통해 지역의 전설을 찾아  향토문화의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저기에서 울고 간 사람 많지”
 봉호산(峯虎山)에서 만난 전광수(60) 씨는 “예전에 결혼하면 삼형제바위를 찾아 예를 드리곤 했는데 그렇지 못한 부부들은 이혼을 하곤 했다”며 “당시 아내와 헤어진 남자들이 뒤늦게 삼형제바위를 찾아 울며 후회하고 갔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운곡리에서 살아온 전 씨는 삼형제바위가 당시 주민들에게 영험한 곳이었다고 말하며 삼형제바위에 얽힌 전설에 대해 얘기했다.

임진왜란으로 부모 잃은 삼형제
바위 되어

 전설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곡리 봉호산 밑에 힘이 장사인 박씨라는 농부가 아내와 아들 삼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다. 무예에 능통한 박씨였지만 본디 고운 심성을 갖고 있어 그는 함부로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오랑캐들이 합덕에 밀려와 주민들을 죽이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자 그는 왜적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많은 오랑캐들을 박씨가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분기탱천해 싸웠지만 적의 칼에 맞고 결국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잃은 삼형제는 어머니에게 의지하며 지냈으나 어머니마저 왜적들이 끌고 가버리자 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고아가 된 삼형제는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봉호산에 올라 산신령에게 매일 빌고 또 빌었다. 기력이 쇠할 때로 쇠한 삼형제는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그만 얼어 죽고 말았는데 이들이 죽자 난데없이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삼형제가 있던 자리에 지금의 삼형제 바위가 솟아 났다고 한다.
 이들이 죽고 얼마 안 있어 왜적에게 붙잡혀갔던 어머니가 돌아왔으나 삼형제는 이미 죽고 난 뒤였다.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잃은 슬픔에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승려가 되었고 그 후에도 삼형제가 그리워지면 이 바위를 찾아 슬피 울었다는 전설이 운곡리에 전해지고 있다.

이젠 산신령에게 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같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삼형제 바위는 오래전부터 운곡리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성한 곳으로 받들어져 왔다. 운곡리에 사는 남완희(69) 씨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주민들과 윤달이 있는 해마다 삼형제 바위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음력 정월십삼일부터 3일간 기도를 올렸어.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밤 11시부터 봉호산에서 산신제가 시작되었고 이튿날 새벽에는 산 아래 사거리에서 노신제가 이어졌지.”
 오랫동안 제주로 산신제를 지내왔다는 남씨는 “산신제의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고 복잡해 요즘 젊은이들이 전승받기를 꺼려한다”며 “우리 때는 3일동안 먹는 거, 씻는 거, 말하는 거 모두 부정탈까봐 항상 조심하고 가렸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엄숙한 분위기에서 산신제가 치러졌다.
 “제사는 3명이 지내는데 산신제가 있기 3일전부터는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그랬지. 그리고 이때 술도 빚었는데 신기하게도 3일째 되는 날만 되면 술이 만들어졌어. 보통 술은 3일만에 안 만들어지거든. 그런데 산신제 때에는 어쩐 일인지 술이 알맞게 익어서 그걸로 제사를 지낼 때 썼어. 또 제사에 쓰인 그릇은 다시 안 가져오고 산에 묻어두고 제가 있을 때마다 꺼내었어. 지금도 제기들은 모두 산에 묻혀있지.”
 몇 십 년째 산신제의 제주를 맡고 있다는 남씨는 당시 산신제와 노신제를 지낼 때 썼던 문서들과 용기(龍旗) 등을 보여주며 “마을의 풍요를 빌던 산신제를 맡아할 후계자가 없어 안타깝다”고 쓸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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