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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지역 명물을 찾아서⑨ 우강면 강문리‘범근내포 조창’]-충청일대 조세가 모였던 곳간범근내포 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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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장의환 전교가 부리포에 서서 옛시절 바다였을 우강평야를 가르키고 있다.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7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우강면 강문리. 모내기를 마친 우강 평야는 연둣빛 물결로 넘실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펼쳐진 평야 위로 이따금 경운기를 타고 오가는 농부들이 보였다. 가을이 돌아오면 농부들의 땀과 하늘이 내린 비, 햇빛, 바람이 평야 위에 황금물결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에게 쌀은 가장 중요한 주식이다.

 

 

 

내포문화권 조세양곡의 집적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우강에는 서산, 태안, 면천, 예산 등지에서 올라온 군·현세미들이 줄을 이었다.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 드린 조세양곡은 북창과 남창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의 남원천을 비롯한 개천을 이용, 배로 범근내포 조창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범근내포 조창(현 우강면 강문리에 위치)에서 모아진 곡식들은 다시 배에 실려져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보내졌다. 조창은 조세로 받은 곡식의 운반을 위해 배가 다니던 바다나 강가에 두었던 창고시설로 옛 군현에서는 공세곡을 징수해 읍 근처에 있는 읍창에 일단 수납하고 이를 국도인 서울 마포항으로 수송했다. 이들 조창은 포구로서의 기능은 물론 연안 항로의 정박지 또는 기착지로서 해상교통에서 큰 몫을 차지했다.

 

 

 

옛 바다와 포구는 학이 나르는 평야로

끝없이 펼쳐진 우강평야 한가운데 서서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쌀가마니들의 행렬을 상상해 본다. 쌀가마니 행렬이 들판에 가득 찬 모만큼이나 끝없었을까.

옛 문헌에 따르면 성종 9년에 바닷물이 얕아져 배 밑이 땅에 닿아 아산 공제곶창으로 조운포를 옮기기 전까지 충청도에서는 범근내포 조창이 가장 큰 조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에 묻혀 창터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 졌다. 새의 부리를 닮았다하여 부리포라 불렸다는 현재의 강문리는 옛 바다와 포구가 모두 논으로 바뀌어 평야를 이루고 있다.

남창터도 마찬가지다. 우강면사무소에서 부리포 쪽으로 100여m 가면 창리 노인정이 있고 그 뒤에 남창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우강면 창리 한완석씨 집 뒤쪽 야산에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팽나무가 옛날 배의 닻줄을 매두던 곳이라는 것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인근에 옛 면장의 산소 앞 경사진 곳 주위를 남창터라 추정할 뿐이다.

옛 바다와 포구, 충청일대에서 거둬들인 곡식들이 모여들었던 조창은 사라지고 이제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우강평야가 조용히 들어 앉았다.

 

 

 

‘당진 땅 안에 예산 땅’, 월경지

조창을 조사하다보면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 까지 오랜 세월 존속되어온 ‘월경지’라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월경지라는 지역은 ‘가’군의 토지가 소속 군현지역과 연결되지 않고 동떨어져 ‘나’군의 토지 속에 존재하면서 가군의 군현에 소속되어 있는 형태를 띄는 것. 즉 당진에 예산 땅이 섬처럼 자리잡은 형세를 띄고 있는 것이다. 옛시절에는 주민들의 생필품이나 상급관청에서 배정받은 공물, 진상품 등을 가급적 군현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만 나는 것들로 모든 것을 충족할 수는 없는 법이고 당연히 타지역의 상품들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타 지역민들에게 있어 각종 부담이 과중되고 착취되는 경우가 발생해 관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월경지라는 특수구역을 두었던 것. 이러한 월경지는 당시 해변 및 하천변에 위치해 조운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삽교천을 중심으로 당진과 아산, 예산 일대에 상당수의 월경지가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진에서는 합덕 인근이 월경지의 역할을 해온 것으로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면천향교 전교 장의환씨

  “옛부터 곡식이 무르익는 풍요로운 고장”

  “조선 당시에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배였죠. 지금처럼 포장길도 없었고 내륙 이동 수단은 우마차가 전부였으니까요. 게다가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어마어마한 쌀들을 한양까지 실어 나르려면 배를 이용해야 했죠.”

면천향교 장의환 전교는 충청도 일대에서 모아진 곡식들을 배에 실었던 부리포(현 강문리)에 서서 당시 바닷물이 차 올랐을 평야를 가르키며 말했다.

“문헌에 따르면 바로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어요. 그리고 이곳 부리포에서 남창과 북창에 모아졌던 곡식들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보냈죠.”

장 전교는 “소들 강문 평야라 불리는 우강·합덕 평야는 우리나라 삼대 평야 중 한 곳”이라며 “당시의 충청일대의 곡식들이 모였던 명성이 지금까지 전해져 풍요로운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내포’를 대동여지전도에 의해 대진(大津)이라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추정”이라며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지도이고 내포는 조선초기부터 사용된 포구명으로 한진(漢津)이 올바른 표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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