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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길 원로목사 ‘링’위에서 내려와도 삶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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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10항쟁때는 대전충남인권위원장으로 불타는 링위에 있었지”

▲ 당진촛불문화제에 참가한 노정길 원로 목사

 목회자 은퇴하고 제2의 고향 초락도에 낙향

뇌경색으로 몸 불편해도 마음엔 ‘더없는 평화’

 일생을 한 길에서 보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 길의 여정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햇살이 되어 빛나다가 길의 끝자락에서 미소한 풀처럼 작아져 장엄한 노을의 웅장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한 생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굴곡진 계곡을 따라 돌다가 미처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쓰러지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노정길(68) 원로목사는 목회자의 한길을 걸어왔다. 게다가 세속적인 말로 ‘운동권 목사’였다. 그는 권력과 부를 쌓아 가난한 성도들의 우러름을 받는 교회의 수장이 아니라 선량한 양들을 지키는 가난한 목자가 되고자 했다.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지 15년째가 되던 1983년 법무부 갱생보호위원으로 재소자의 인권과 갱생을 위한 노력에 지원을 보내며 세상 깊숙이 발을 들였다. 그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바로 1987년 6월항쟁 때였다.

1980년 광주의 봄은 이제 국민 모두가 알게된 역사의 비극이자 진실이지만 당시 광주를 희생양으로 군사력을 통해 집권하고 유지되던 5공화국 아래서는 사정이 달랐다. 진실은 폭로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공방속에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와 지식인, 성직자, 학생들이 투옥되거나 다쳤으며 스스로 분신해 목숨을 거두는 저항도 줄을 이었다. 게다가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1987년 국민항쟁은 군사정부를 거부하고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자는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4ㆍ13호헌조치로 국민의 개헌요구를 거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다시 이어졌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교내시위 도중 직격최루탄을 맞아 또다시 죽음을 앞두게 되자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6ㆍ10항쟁이 일어난 날은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노태우 대표위원을 추대한 날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백만국민이 정부에 저항했다.

노 목사는 당시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선교위원회(KNCC) 대전충남위원장을 맡고있었다. KNCC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계 성직자들로 구성된 단체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보호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대전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노 목사는 어렵게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군사정부 아래서 내놓고 민주화운동 대열에 나선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걸고서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타오르는 불길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했다기보다는 뒤에서 구속자들을 보호하느라 도경국장과 담판을 많이 지었지... 경찰도 정복을 벗으면 똑같은 시민이고 사람이다.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마라... 그렇게 담판지어서 형 받는 사람을 줄이고 형량도 가볍게 해주고 그랬지.”

노 목사는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그때 우리교회 교인중에 보수적인 분들이 많았는데 내 권유로 마음의 문을 많이 열었어. 그래서 쫓기던 청년시위대를 맞아 재워주기도 하고 그랬지. 그 교인들은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좋아해. 그리고 도청앞으로 진입하려는 충남대 시위대를 서부경찰서장이 막지를 않았어. 그 사람 내가 잘 아는 이인데 결국 옷벗고 운동권 목사님과 사돈을 맺었지. 허허.”

  노 목사는 1997년 당진 초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당진참여연대와 당진환경운동연합이 창설할 당시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경기도로 떠났다. 안타깝게도 2006년 7월의 첫 번째 주일,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새벽기도할 때부터 몸이 자꾸 옆으로 쓰러지더라고. 그런데 주일예배를 앞두고 병원에 갈 수가 없었지. 게다가 그날은 면장을 비롯해서 마을주민들을 다 모셔다가 잔치를 준비한 날이었거든. 그날 강단에 올라갈 때는 내발로 올라갔지만 설교를 마치고는 내발로 걸어내려오지 못했어. 점심잔치를 시작하고나서야 병원에 갔는데 병원장이 ‘너무 늦게 오셨어요. 새벽에 바로 오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더군. 오른쪽 수족마비하고 언어장애가 와버렸어.”

여름을 지나 목회자 자리를 사임했다. 뜻하지 않은 지병과 갑작스런 사임 등 준비하지 못한 채 다가온 시련이 놀랍고 절망스러웠다. 그해 12월 초락도의 한 동리로 내려왔다. 집도 절도 없이 교인이 선물한 1인용 방갈로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사람들과의 교류를 멈추고 오로지 자신과 함께 그 겨울을 보냈다. 눈밭에 넘어져 구르고 엉망이 되면서도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평화로와져 있다.

“고향도 아니면서 당진에 내려온 이유? 난 당진이 좋아.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사람도 좋고. 60년대 첫 목회도 천의에서 시작한 걸.”

다행히 몇해전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말년을 보내자고 땅을 얻어놓은 게 있어서 지난해 7월 집을 지었다.

“살아남은 이유? 아직 할 일이 있어서지.”

그것은 사랑하는 딸들에 대한 책임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목회자로서의 삶이 정리되자 평범한 두딸의 아버지로, 한 아낙의 지아비로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변두리의 작은 것들과 그 아름다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링 위에서 내려와도 삶은 여전히 아름다워. 어쩌면 중심에서 밀려나서 비로소 자유로와졌지.”

  불타는 ‘링’의 한가운데 있던 1987년 6월로부터 21년이 지난 올 6월10일. 원로목사는 안개자욱한 날씨때문에 망설이다 운전대를 잡았다. 왼손과 왼쪽다리만으로 운전할 수 있도록 손본 작은 차를 끌고 6ㆍ10촛불문화제가 열리는 당진신터미널 광장으로 향했다. 안개가 심한 탓에 시작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있다. 돌아보면 후회없는 길을 걸었다. 그 세월들은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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