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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⑤마지막회] 생태도시 쿠바의 사회문화 - 아직도 멈추지 않는 체게바라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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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젖게 하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 혁명광장 뒤로 체게바라의 모습과 함께.

 

춤과 음악은 그들의 일상

 우리에게 알려진 쿠바의 대표 브랜드는 무엇일까? 쿠바에 도착하기 전, 인천-밴쿠버-토론토-아바나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은 많은 사색과 더불어 호기심을 낳았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회주의의 대표적 정치지도자 카스트로. 그의 쿠바내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전 세계 환경주의자들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유기농업, 아바나의 도시농업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는... 아바나 시내 외곽 방파제 말라콘의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시가(Cigar)를 물고있는 쿠바인의 실제모습은...

 수많은 궁금증이 긴 여정 동안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 일행을 설레게 했던 것은 전세계 영화인과 음악인의 마음을 울렸던 기록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쿠바에서 만나는 일이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1930-40년대 번성했던 아바나 동부의 사교장이었다고 한다.

 쿠바혁명과 함께 쿠바음악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고 이곳에서 연주하던 연주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1996년 기타리스트이자 제3세계 음악전문 프로듀서, 라이 쿠더는 잊혀진 뮤지션들 가운데 현존한 사람들을 모아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앨범을 발표, 이들은 다시금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7년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트로피걸 라틴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고 음반은 전 세계에 6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아바나 구시가지에는 허름한 건물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쿠바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음악과 춤이 일상인 시내 곳곳에는 영화의 장면과 선율이 따라 흐르고 있었다.

 쿠바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찌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유럽세력의 관문이었다. 쿠바의 문화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고 원주민의 전통이 혼합된 형태로 그 바탕에는 수세기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식민통치와 그들이 데리고 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우수한 교육시스템, 열악한 교육환경

 혁명 이전 쿠바는 40~50%에 달하는 문맹율과 인종차별, 도시와 농촌의 교육격차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세계은행 통계에 의하면 1958년에는 전체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아이들만이 학교에 다녔으며 1만명의 교사가 실직상태였다. 기술자와 전문가는 4.4%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매우 열악한 교육환경에 놓여 있었다.

 카스트로는 혁명 후인 1959년 교육개혁법을 제정하고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를 의무교육으로 정했다. 대학과정도 무료로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부에서 생활비도 보조해주고 있다.

 쿠바교육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환경교육을 매우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초등학교에는 학교 텃밭을 만들고 중학생들은 농촌에서 한달 가까이 농사일을 하면서 자연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생태주의, 유기농업, 환경보호에 대해 배우게 하고 있다.

 하지만 쿠바의 우수한 교육시스템도 경제위기와 함께 위기를 맞고 있다. 교육예산이 절반 가까이 삭감됐고 경제봉쇄의 영향으로 종이, 연필 등 교육자재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해 지고 있었다.

 실제로 일행이 방문한 아바나 구시가지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운동장 없는 학교, 열악한 기자재, 쿠바가 자랑하던 유기농 급식마저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장실 벽면에는 여전히 카스트로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교장은 학생들에게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주도하다 볼리비아에서 처형된 체게바라처럼 살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쿠바도 교육열이 높아 과외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헤밍웨이와 체게바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이것은 체게바라가 남긴 명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샤르트르가 ‘동시대의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 칭했던 중남미의 대표적 혁명가 체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잡혀 총살당한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체게바라 열풍이 멈추지 않고 있다.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수도 아바나에서 주변관광지, 농촌지역 어느 곳에서든지 체게바라를 만날 수 있었다. 쿠바의 어디에서든 그는 숨쉬고 있었다. 쿠바 국민들이 입는 티셔츠에서부터 도로변과 공공건물에 걸린 체게바라의 초상화,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추모음악들이 그러했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키고 초대 상공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겸임하면서 쿠바의 의료체계를 세계 최고의 의료시설로 개혁한 체게바라는 1928년 쿠바가 아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53년 의사가 된 후 중남미 여행 중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고 56년부터 게릴라 훈련을 받으며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59년 쿠바혁명 후 사회개혁에 몰두하던 그는 6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홀연히 사라졌다. 그해 벨기에령 콩고(지금의 자이레)를 해방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66년 볼리비아를 해방시키려 잠입했으나 67년 10월 정부군에 포로로 잡혀 총살당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남미 최고의 아이콘으로 체게바라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지난 5월 제61회 칸느영화제에서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체’가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지난해 그의 탄생 80주기에는 중남미 민중의 자유와 주권을 위해 투쟁한 그를 기리기 위한 추모행렬이 이어져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체게바라가 쿠바의 정신을 대표한다면 미국작가 헤밍웨이는 쿠바관광상품을 대표하는 아이콘 가운데 하나다.

 두 나라 사이에는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가 쿠바의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가 이곳 쿠바의 아바나에서 집필되었고 아바나 외곽에 있는 고히마르 마을은 헤멩웨이의 대표적 단편 <노인과 바다>의 실제무대이기도 했다. 쿠바는 헤밍웨이가 거주했던 이곳을 박물관으로 꾸미고 그가 사용했던 각종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체게바라 명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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