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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3돌 특집 | 월요일에 만난 사람 - 남기환 남상락 선생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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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문화재로 등록된 ‘남상락 자수 태극기’


“일제시대 때 할머니께서 명주천에 수놓은 태극기
 해방 못보고 가신 할아버지의 넋이 되었습니다”

당진의 만세운동 혼(魂) 안고 펄럭이는 ‘남상락 자수태극기’
독립선언서 몰래담아온 남포와 함께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1919년 4ㆍ4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된 남상락(南相洛) 선생의 옥중시(獄中詩)다. 
 당진지역의 3ㆍ1운동으로 불리는 4ㆍ4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과 당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 혼(魂)처럼 남아 아직도 펄럭이는 태극기가 있다.
 지난해 8월15일부터 독립기념관 광장에서 다른 태극기들과 함께 휘날리고 있는 ‘남상락 자수 태극기.’ 독립기념관이 <역사속의 태극기(TAEGEUK-GI IN THE HISTORY OF KOREA)>라는 이름으로 보관해온 12점의 태극기 가운데에 이 태극기가 포함돼 있다. 게다가 이 태극기는 문화재청이 올해 광복절과 정부수립 60년을 기념하며 국가문화재로 등록한 15점의 옛태극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1면>  
 태극기의 주인공 남상락 선생은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 출신으로 1919년 거국적인 3ㆍ1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당진군 대호지면과 정미면 일대에서 일어난 4ㆍ4독립만세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6년 선생의 장자(長子) 고(故) 남선우(南先祐)씨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선친의 유품 중에는 부인 구홍원(具鴻瑗) 여사가 손수 명주천에 수를 놓아 만든 이 태극기와 고종황제 인산때 상경했던 선생 등(남상락, 남상직, 남주원, 남계창)이 만해 한용운(韓龍蕓)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아 숨겨가지고 온 남포도 포함돼 있었다.
 
 남상락 선생의 손자 남기환(60)씨를 만났다. 남씨는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태어났다. 아깝게도 해방을 앞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은 뵙지 못했다. 할아버지 남상락 선생은 충장공 남이흥장군의 11대 손이기도 했다.
 현재 서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선조들의 거룩한 기상과 값진 희생이 후손인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흐려질까 걱정된다고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더구나 형 대신 집안 대소사 뿐 아니라 가풍을 어깨에 짊어지기가 자신에게는 무거울 따름이라고 몸을 낮췄다. 백형 현욱씨는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수학하고 세종대 교수와 김영삼정부 행정쇄신위원등을 지냈으나 아깝게도 몇해전 독신인 채 세상을 떠났다. 동생 기현씨도 20여년전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남기환씨가 어려운 시간을 내어 본사를 방문해 주었다. 정성껏 정리한 자료를 들고 왔을 때 그 진중함과 경건한 마음가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료 한 장 한 장에 기울인 정성으로만 봐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남상락 선생의 부인 구씨, 그러니까 남기환씨의 할머니가 손수 자수를 놓아 만들었다는 명주천 태극기를 사진으로나마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흐른 시간만큼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헤졌지만 거기에는 나라를 피붙이처럼 애지중지 여기며 애달파했던 식민지 조선 남녀노소의 시리고 뜨거운 속내가 배어 있었다. 남상락 선생이 투옥된 후 공주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한, 그리고 부인 구씨가 옥중에 있는 남편에게 보낸 서찰도 볼 수 있었다. 한 구비 커다란 역사의 능선 속에서도 저마다 사연들은 알뜰한 것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종종 4ㆍ4운동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께서는 광복을 2년 앞두고 돌아가셨지요. 출옥 후엔 만주로 가시려다 생각을 접으셨다더군요. 당시 함께 투옥된 큰할아버님이 고문 후유증으로 서른넷의 나이에 별세하셔서 홀어머님을 두고 차마...”   
 손자 남기환씨의 말이다. 큰할아버지 남상돈(南相敦) 선생도 당시 만세운동의 주역 중 한사람이었다. 남상돈 선생은 출소 후 1년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숨졌다. 4월4일 거사 후 일본헌병에 체포된 남상락 선생은 4년형을 언도받은 후 여러차례 상고한 끝에 8월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정작 출소한 것은 1920년 9월, 옥고를 치른 기간은 1년6개월이었다.
 출국을 포기한 선생은 남상직, 이대하 등 당시 4ㆍ4운동의 주역들과 함께 대호지면 사성리, 도이리 등에 학당을 설립해 문맹퇴치와 민족자결사상 고취에 힘쓰지만 이마저도 일경의 방해로 수년 후 폐지됐다. 선생은 광복을 보지못한 채 1943년 5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상돈ㆍ상락 형제분의 선영과 비석은 대호지면 도이리 장촌(長村)에 있다가 올 4월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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