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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 입력 2009.06.08 00:00
  • 수정 2015.06.12 22:16
  • 호수 764

[기획 - 우리지역 문화재를 찾아서 3 -­ 우강면 원치리 충남문화재 자료 제330호 ‘한갑동가옥’] 100년 역사 간직한 전통가옥, 위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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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와 사랑채로 이뤄진 조선시대 주택양식 그대로

●편집자주 /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10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총 1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며, 지난해 소개됐던 문화재 중 변화가 있는 곳은 재 취재해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위례장을 찾았다. 이제는 주변에 현대식 양옥집들이 들어선 터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옛 위상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전통 가옥이 갖는 고유의 품위는 그대로였다.
위례장(慰禮場)이라고도 하는 ‘한갑동 가옥’은 1993년12월31일 충남문화재자료 제330호로 지정된 전통가옥이다. 우강면 원치리 모정마을에 위치한 위례장은 이 마을 출신인 故 한갑동 시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현재는 그의 맏아들인 한명우(선문대 교수) 씨가 물려받아 소유, 집 관리는 마을 토박이인 주민 박상진 씨 부부가 맡아 하고 있다.
당초 위례장은 90여 년 전 한갑동 씨의 조부가 행정구역 통폐합 후 면천군에 있던 고을 원님집의 자재를 옮겨다 지은 고택이다.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로 구성된 위례장은 전체로 보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한 가운데 마당에는 햇살이 내려앉고 안채 뒷마당에는 장독대와 잔디밭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갑동씨가 살아생전에는 직접 위례장에 살며 집을 관리했었고 그 이후에는 아들 한명우 씨가 살다가 5년 전부터는 집이 비어 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부스러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랫동안 빈집으로 방치될 경우 부식이나 파손이 쉽기 때문에 박상진 씨가 위례장에 들어와 거주하는 일이 논의되고 있다고.
1919년 지어진 위례장은 조선시대의 전통 한옥으로 안채는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안방과 웃방, 왼편에 건너방을 두었다. 대문과 중문이 자리한 -자형의 사랑채에는 오른쪽 끝에서부터 툇마루, 사랑대청, 1칸씩의 사랑방, 중문, 고방 등을 두었다.
낮은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는 방과 방사이가 문으로 연결되어 통한다. 부엌 천장에 위치한 다락방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나무로 섬세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게 조각된 문창살과 100년 가까이 집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와 주춧돌에서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옛 선조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안채 뒤 벽면에는 흥미로운 그림과 글씨들이 있다. 박상진씨의 말에 따르면 이 그림은 한갑동 씨의 부친이 그린 것으로 ‘눈에 삼이 섰을 때 처방했던 민간요법’이라고 한다. 눈이 시리고 아플 때 얼굴 그림을 그려 눈 부분을 꼬챙이로 찍어서 ‘삼을 잡아 아픔을 치료한다’는 의미라고.

△위례장 사랑채의 툇마루.
▽위례장 안채 뒷벽면에 그려진 한잡동 부친의 민간요법 그림.

[인터뷰] 위례장 관리인 박상진 씨
“마을서 유일한 고래등 같던 기와집”

“제가 어릴 적에는 이 근방이 전부 초가집이었죠. 위례장과 한갑동 어르신의 작은 아버지댁인 저 건너편 집, 두 집만 기와집이었어요. 이 동네에서 이 집 땅을 안 밟고 산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원치리에서 나고 자란 박상진씨는 위례장의 옛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갑동 어른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족두리를 쓰고 앉아 계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동네 형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채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을 자주 봤다고 해요.”
박씨는 “대청마루며 대들보, 창문살 하나하나 100년 가까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옛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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