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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들 하나 둘 세상 떠나고...” - 석문면 초락도리 최병돈·가재문·박복환 어르신

6.25 참전용사의 초라한 노후 당진시대l승인1999.07.19 00:00l(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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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들 하나 둘 세상 떠나고...”



6.25 참전용사의 초라한 노후



석문면 초락도리 최병돈·가재문·박복환 어르신





석문면 초락도. 대호방조제 공사로 바다가 막히기 전 이곳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육지도 됐다가 섬도 됐던 오지중에 오지였다.

1951년 6월,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 최병돈·가재문씨는 이 마을에서 굴 캐고 조개잡아 해창나루터로 싣고가 당진장으로 팔러 다니던 어부였다.

가씨는 장가든지 1년째 되던 새신랑으로 어린 딸 하나를 두고 있었고, 최씨는 1년전 아버님을 여의고 8남매 집안의 가장으로 힘겨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당시 고대면 성산리에 살던 박복환씨도 가난한 어부였다.

초등학교 문턱을 나온 이는 최병돈씨가 유일. 가씨와 박씨는 마을단위에 있던 강습소를 4~5년 가량 다닌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들 모두 ‘조선역사’는 배운적이 없는 불행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6.25가 터진 지 꼭 1년이 되던 그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도 힘겨웠던 그들에게 영장이 날아들었다.

세 청년은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못하고 처자식과 부모, 어린형제들을 고향에 남겨 놓은 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던져졌다.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8남매의 가장으로 영장을 여덟번이나 받은 끝에 입영한 최씨도,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자식을 둔 가씨도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외일 순 없었다. 그해 석문면에서 24명, 초락도에서만 7명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합덕초등학교에 1차 집결해 군산에서 배를 타고 꼬박 이틀 걸려 도착한 곳은 제주도 훈련소. 이곳에서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배치됐다. 최씨는 전방 1사단, 가씨와 박씨는 지리산이었다.

“죽을 고비? 말로 다 할 수 없지. 그것도 그거고 배고픈 건 더 참기 어려웠어. 구정물통 뒤져 나오는 것 있으면 떠 먹을 정도였으니께.”

고향에 두고온 가족 걱정은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마당에선 가족도 남이었다.

독립연대로 창설된 부대에 배치됐던 가재문씨의 경험.

“지리산 함양에서 있었던 일인디, 아군 2개 중대가 공비에게 전멸당한 적이 있었어. 한밤 중에 상사가 덩치 큰 대원을 뽑아 올리라 하여 난 급식이 왕창 나온 줄 알고 튼튼한 장병을 뽑아 올렸었지. 근디 웬걸.”

기다렸던 급식은 고사하고 덩치 큰 그 대원은 그날 전멸당한 아군의 시체를 트럭에 싣는 일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던 전쟁도, 세 청년이 참전한지 2년째되던 53년 7월20일 끝이 났다. 한쪽에선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도 있었지만 참전군인들의 지상 최대의 희망은 죽음의 전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이들은 곧바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가장이었던 최병돈씨만이 참전 33개월만에 비교적 일찍 제대를 했고, 두 사람은 55년도, 57년도에 각각 제대를 했다. 가씨는 4년만에, 박씨는 무려 6년간 군 복무를 한 셈이다. 엄연히 종전이 아닌 휴전이었기에 최대한의 병력을 확보해 놓기 위해 군번순에 따라 제대를 시켰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나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들을 기다린 건 다름아닌 ‘가난’이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난의 시대 비껴갈 수 없었던 운명들

“젊은 청춘 바쳤는데..., 나라선 뭘 해줬나”



바다는 늘 풍족했지만 내다 팔 곳이 없었고 배운 것 없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이들에게 가난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게다가 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세월 한 토막을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보내야 했다.

“전쟁에 나갔던 사람 거의가 살기 어려웠지. 지금도 그래, 우리 또래덜은 번듯하게 사는 사람 몇 없어. 허긴, 시대가 그랬으니께.”

먹고 살기위해 별의 별 짓을 다해 보았다는 이들은 지금 여느 시골 노인네들과 같이 자식들 모두 외지로 떠나 보내고 생업을 잃은 댓가로 주어진 논 한뙤기가 재산이 전부이다. 참전용사라는 당당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사는 최씨는 생활보호대상자이다.

“젊었을 때는 먹고 살기 바뻐 아무 생각 안했었지. 그런디 나이가 먹으니께 우리가 나라를 위해 희생을 했다는 것이 머릿 속에 자꾸 맴도는겨. 이젠 나라에서 뭔가 예우를 해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것 말여.”

전후 반세기가 다 됐지만, 이들에게 나라에서 해준 것은 ‘참전’이라는 글자가 적힌 주민등록증 같은 ‘증’ 하나와 집 대문에 ‘참전용사의 집’이라는 표찰을 달아준 것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말 그대로 단순히 신분을 알리는 증에 불과할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4.19의거 희생자들은 민주화운동의 역군으로 칭송되고, 5.18도 민주화운동이라고 희생자들에게 보상을 주고 있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이 분들에게도 공공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게 하는 등의 예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옆에 있던 김원식 이장의 말이다.

가난이 답답해 한 때는 차라리 그때(전쟁 때) 다리 한쪽이라도 잃었더라면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는 최병돈씨. “꼭 어디 한 군데 부상당한 사람만 나라위해 몸바친 이들이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 함께 참전했던 석문면 전우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손철세, 박용석, 홍순영, 김병학... 이름없이 살다가 젊은 혈기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불사르고, 또 이름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 누구에게나 인생은 소중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한 시대를 산 이들에게 남은 인생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 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자긍심도 세인들의 무관심과 정부의 무대접으로 점점 희석되는 듯 했다.

“좋은 소실 들어야 참전용사라는 것도 자랑스럽지.”

이들에게 자긍심을 되찾아 주는 일, 대단한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 후손들은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를 전할 수 있는 작은 예우를 해주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의 의무가 아닐까. 세월은 이들을 마냥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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