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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셋째 아들, 심재호가 말하다 4 심훈의 주변인물과 <박군의 얼굴>에 얽힌 이야기 “문인이자 언론인, 영화인, 독립운동가였던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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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활동으로 맺은 역사적 인물들과의 친분
박헌영, 신채호, 홍명희, 여운형 등과 절친

[편집자주]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가 평생토록 모으고 간직한 심훈의 유품 4천5백여 점을 미국에서 당진으로 이전해 오기로 약속했다. 본지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보도하면서 새삼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심훈의 육필원고에는 일본인들이 시뻘건 줄로 검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토록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중요한 유적인가. 역사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심재호 씨가 한 달여간 당진에 머물며 심훈 육필원고를 총정리한 뒤, 지난 15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토록 아버지 심훈의 발자취를 쫓았다. 심훈의 유품을 모으고 관리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그 자신도 아버지 심훈을 빼닮은 삶을 살아왔다. 군사정권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북한을 수시로 오갔다. 심재호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기억하는 필경사와 공동경작회,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를 모으게 된 과정 등에 대해 듣고 기록한 것을 연재 보도한다.       

 

▲ 여운형

<상록수>와 시 ‘그날이 오면’이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심훈은 소설가이자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영화배우로, 감독으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폭 넓은 활동을 해 온 인물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 이수일 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27년에는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원작·각색·감독을 맡았다. 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18세 되던 해 3.·1 운동에 적극 가담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다양한 활동을 해 온 만큼 심훈 주변에는 역사적 인물이 많다. 그 중에서도 박헌영이라는 인물이 첫 손에 꼽힌다. 심훈은 경성제일고보 1년 선배이자 훗날 조선공사단 창립에 참가했고 북한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된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다. 23세에 동아일보에 입사해 박헌영과 함께 일 년 만에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신채호, 홍명희, 여운형 등과 깊이 사귀었다. 여운형은 심훈의 장례식장에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울면서 낭송할 정도로 가까웠다고 한다. 심재호 씨도 아버지 심훈의 주변 인물에 대한 회상을 꺼내 놓았다. 심재호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지인 중에는 매일신보 미술부 기자를 지내고 삽회동인회장을 맡았던 원로동양화가 고 이승만 화백도 있었다.
“영화배우들도 많았고... 아버지 친구 분들이 ‘내가 심훈의 친구’라며 찾아왔던 일도 많았어요. 내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에요. 친한 친구 아들이 커서 동아일보에 다닌다고 하니까 아버지 친구 분들이 곧잘 찾아 오셨었지. ‘나 왔네~’하고 오셔서는 옛날 아버지와 지냈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어요. 덕분에 내가 술도 참 많이 샀지.”

‘박군의 얼굴’ 실제 모델은 누구
심훈의 소설이나 시에는 실존 인물을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 많다. 조카인 심재영을 모델로 한 <상록수>가 대표적이다. 또한 시 ‘박군의 얼굴’도 실존 인물에 대한 묘사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게 ‘박군의 얼굴’의 박군은 박헌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심재호 씨는 박군이 박헌영이라고만 단정 짓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박헌영이가 ‘박군의 얼굴’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만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박헌영은 모두가 아는 독립운동가였고 사회운동의 주도자이었지요. 남한에서는 ‘빨갱이 두목’으로 알려져 있지요. 김일성과 주석의 자리를 놓고 이야기 될 정도의 핵심인물이었잖아요. 시대가 시대인만큼 박헌영이 공산당이니까 당시에 우리 아버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박군은 박헌영이라고 붙여 놓은 거예요. 심훈도 빨갱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심재호 씨는 박헌영과 심훈이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함께하며 가까이 지낸 사이는 맞지만 박군의 얼굴 주인공을 박헌영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사실 확인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경성제일고보 교지를 보면 박열도 있고 박헌영도 있고 이범석이도 있어요. 그러니 ‘박군’이 박열일 수도 있지요. 박열은 진짜 심훈의 친구였고 동창생인데다가 독립운동가였잖아요. ‘박군의 얼굴’ 속 주인공이 누군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봐요. 한편 일각에서는 ‘박군의 얼굴’에는 박헌영과 박열, 박병순 모두가 묘사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올해 3월 경향닷컴에 발표된 고열 씨의 ‘심훈, 그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 칼럼에서는 ‘박군의 얼굴’에는 세 명의 박군이 등장한다고 해석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박헌영이 첫 번째고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1923년 천황 암살 기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이라는 것. 또한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고문으로 숨진 시대일보 기자 출신의 박병순이라는 해석도 있다.
35세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심훈은 다양한 활동을 해 온 역사적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심훈의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인들과 학자들의 중론이다. ‘박군의 얼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들과 심훈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심재호 씨의 말은 어쩌면 심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언질이 아닐까.

 

박군의 얼굴

                 심훈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홀병에 담거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중략)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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