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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셋째 아들, 심재호가 말하다 5·6 아버지 심훈 빼닮은 심재호의 삶 “‘그날’은 통일이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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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사건’ 직전, 언론탄압 못 견뎌 미국 이민
미국서 <일간뉴욕> 발행, 남북문제와 이산가족문제 보도

북한 수십차례 오가며 이산가족찾기 운동

[편집자주]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가 평생토록 모으고 간직한 심훈의 유품 4500여 점을 미국에서 당진으로 이전해 오기로 약속했다. 본지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보도하면서 새삼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심훈의 육필원고에는 일본인들이 시뻘건 줄로 검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토록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중요한 유적인가.
 역사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심재호 씨가 한 달여간 당진에 머물며 심훈 육필원고를 총정리한 뒤, 지난 10월15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토록 아버지 심훈의 발자취를 쫓았다.
 심훈의 유품을 모으고 관리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그 자신도 아버지 심훈을 빼닮은 삶을 살아왔다. 군사정권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북한을 수시로 오갔다.
 심재호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기억하는 필경사와 공동경작회,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를 모으게 된 과정 등에 대해 듣고 기록한 것을 연재 보도한다. 

 

심재호 씨는 아버지 심훈을 꼭 빼닮았다. 큼직한 풍채도 그렇고 짙은 눈매도 그렇다. 비단 생김새만 닮은 것은 아니다.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통일에 대한 열망, 그와 관련된 행보도 닮았다. 심재호 씨는 군사정권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언론억압과 통제, 검열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붓을 꺾었던 기자 출신이다. 미국에서 <일간뉴욕> 편집장을 지내던 시절에는 북한을 수십차례 오가며 이산가족찾기에 열을 다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재호 씨의 일생은 늘 아버지 심훈의 이야기에 가려져 왔다. 심재호 씨의 삶을 되짚다 보면 몇 해 전 생사의 기로에 선 심 씨의 곁을 지켰던 그의 아내가 “평생 아버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서운하다”고 했다는 말에 절로 공감이 간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고 평가받는 방대한 육필원고가 수십년이 지난 오늘,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은 곧 심재호 씨의 70 평생 그 자체였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던데, 심 씨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언제나 아버지 심훈과 그의 유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심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작정을 하고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야 겠다며 그가 머물던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하지만 역시나 인터뷰는 심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동아일보 광고사태 직전, 언론탄압 못 견디고 사퇴
“군대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취직을 못하고 있었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학관선생을 했었어. 그러다 어떻게 눈에 띄었는지, 동아일보에서 오라는 거야. 이희승 씨가 있을 때였어요. 근데 마침 그때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0주기가 될 때였어. 출판사에서 심훈 전집을 만들테니 도와달라고 했거든. 그래서 동아일보에 못 간다고 했지. (웃음)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동아일보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심 씨는 1966년 출판사 탐구상에서 심훈 전집을 만들고 이듬해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7여 년을 <신동아>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문화담당이었던 만큼 60~7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주요 취재원이었다.
“주로 학자, 문인들과 만났지요. <신동아> 잡지 성격이 작가, 문인들이 주요 고객이고 필진이었거든. 최일남(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씨, 소설가 하근찬 씨, 故 박경리 작가, 박경리 작가와는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어요. 밤낮 거절만 당했지(웃음). 그렇게 아프면서도 글 쓰고 계셨었어요. 또 <문학과 지성> 초대 대표이사였던 김병익 씨, 김병익 씨는 후배 겸 같이 있던 동료이기도 하고.”
8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했던 심재호 씨는 74년 1월,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글을 못 쓰는데 기자를 해서 뭐하냐”는 것이 이유였다.
편집담당 기자였던 심 씨는 밤낮없이 매일 서울시청 지하실로 초판을 들고 검열을 받으러 다녔다고 회상했다.
“검열을 받으러 가는 것부터가 견딜 수가 없었지. 검열관들이 아무거나 덮어놓고 빨간 줄을 그었어요. 뭘 알고 긋는 것도 아니고 불온문서도 아닌데 ‘무조건 내 말 들어라’는 게 당시의 검열이었어. 심지어 소설 연재에도 빨간줄을 그었어요. 저희 비위에 맞지 않는 글은 쓰지 말라는 거지. 그런데 검열을 안했다고? 일본만 검열했다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 언젠가는 <차관>이라는 르포기사를 검열하는데 검열관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심 기자, 이거 어떻게 읽지?’라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검열한다는 사람이 한문도 못 읽어서 어떻게 읽냐니... 나 원.”

군사정권, 울화통 터져 다시 글쓰기 시작
 미국으로 건너간 심 씨는 노동을 시작했다. 무작정 떠난 미국에서 가족들과의 삶은 당시 이민자들이 모두 그러했듯 녹록치가 않았다.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스스로 신문사를 나오면서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심 씨가 다시 펜을 든 건, 미국에서 샌드위치 장사를 할 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광주사태가 났어요. 한국에서는 광주사태가 하나도 보도 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자세히 보도가 됐었지. 그때 울화통이 터져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붓을 꺾어 버린 지 오래됐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세상은 괴상하게 돌아가고 글은 써야겠고, 글 쓸 곳은 없고.”
심재호 씨는 샌드위치를 만들던 테이블에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손님이 오면 칼과 도마를 꺼내 놓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손님이 없을 땐 원고지를 꺼내 놓고 글을 썼다. 그때 쓴 글을 엮은 책이 바로 1998년 발간된 <서서 쓰는 글>이다. <서서 쓰는 글>에는 진실을 그대로 밝히지 못하는 한국 언론에 대한 비판, 우리 현실을 걱정하는 글, 이산가족문제 등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서서 쓰는 글이 미주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 한인사회에서 심 씨의 글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단다. 그리하여 심 씨는 미주 <동아일보>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한인사회에서 인기를 끄니까 미주 동아일보에서 일을 맡아달라고 제안을 해 왔어요. 그래서 편집장도 하고 주필도 했지. 그러다 얼마 후에 <일간뉴욕>을 만들게 됐어요.”
<일간뉴욕>를 통해 심 씨는 남북문제, 이산가족문제, 언론탄압으로 보도되지 못하는 한국의 사건, 한인사회 이야기 등을 주로 다뤘다.

“가족을 찾게 해준 건 선택사항이 아니죠”
심재호 씨는 일간뉴욕을 만들면서 남북문제와 이산가족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특히 ‘형제를 찾으라’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북한에 있는 큰형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산가족’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고민과 행보를 이어갔다. 
“형은 남한에 있고 동생은 북한에 있어요. 살아 있다는 건 알게 됐지만 더 이상 만날 수도 연락을 할 방도가 없지. 그러니 이 사람들이 나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거예요. 나는 미국에 있으니까 북한하고도 편지를 할 수가 있으니까. 형이 미국에 있는 나한테 동생에게 보낼 편지를 부치면 나는 그 편지를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주는 거지요. 우표 값이 한 달에 700불이 넘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빚도 지었지.”
심재호 씨는 자신이 이산가족찾기와 남북문제에 집중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사람이 일할 때 좋아서만 하는 건 아니에요. 할 수 없이 할 때가 있어. 우리 형이 6·25 전쟁때 없어졌는데 찾았고 사람들도 만나보면서 자연스레 이산가족에 대해 깊이 알게 됐죠. 손해 보는 건 전부 일반 사람들이죠. 북한에서 먼저 이산가족찾기에 앞장서 달라고 요청을 해왔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요. 싫건 좋건, 돈이 있건 없건 해야 하는 일이 생긴 거죠. 물처럼 따라 흐르는 거예요. 집을 팔아도 아깝지 않고 하게 되는 일이었죠. 내가 없으면 저 사람 가족을 못 찾아주니까. 가족을 만나게 하는 건 하기 싫다, 좋다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심재호 선생은 1200여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나도록 주선하고 미국에서 힘들게 번 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산가족찾기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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