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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줄이야기11 밴드마스터 박웅열 씨]
“음악이 좋아 업소 다녔다면 남들이 웃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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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고 밴드부 출신, 30년 가까이 밤무대 올라
성인주점에서 노래 반주하는 밴드마스터

1970년대 말은 가요계 거장, 조용필과 이문세가 데뷔할 무렵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불붙은 밴드들의 음악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민주화 운동가요, 포크송과 팝송까지 다양한 음악장르가 사랑받던 시절을 우리는 요즘 ‘7080세대’라 부른다. 박웅열(53) 씨는 7080세대의 음악인이다.
30여 년 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 씨는 고향 당진을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젊은 혈기에 무작정 집을 나선 박 씨가 찾아간 곳은 겨울방학에 잠시 다녔던 인천의 한 음악학원.
“음악이 하고 싶었어요. 거기서 원장님이 다른 멤버들을 소개시켜 줘서 팀을 짰죠.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인디밴드나 마찬가지예요. 우리 노래랄 건 없고, 다른 가수들 노래를 죽어라 연습해서 무대에 올랐죠. 인천의 맥심 디스코 나이트클럽이라고 하면 요즘 사람들이 알려나? 거기가 첫 무대였어요.”
음악이 좋아 시작한 밴드생활은 악단생활로, 다시 혼자 손님들의 노래에 반주를 맞추는 성인주점의 밴드마스터로 이어졌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 30년 넘게 지속되는 동안, 맨손으로 고향을 떠났던 청춘은 흰머리가 늘어나는 중년이 됐다. 손님들과 실강이를 하며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삼남매가 자랐다.
6년 전, 부모님 건강이 좋지 않아지면서 박 씨는 고된 타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음악을 쉽게 놓지 못하고 취미 삼아 요즘도 종종 밴드마스터 일을 한다는 박 씨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할 거라고 말했다.

신평고 밴드부 1기 출신
박웅렬 씨가 음악의 매력에 빠진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신평고(4회 졸업) 1학년 시절 학교 밴드부로 선발된 것이다.
“뭐 평소에 노래를 잘해서도 음악을 좀 알아서도 아니에요. 그냥 무작정 선생님이 시키신 거죠. 호기심이 생겨서 선뜻 한다고도 했지만요. 그 당시 밴드부라면 고적대를 떠올리면 맞을 거예요. 교련시간이나 학교 행사 때 음악을 연주하는 거예요. 그때 트럼펫을 불었죠.”
밴드부 활동이 계기가 되어 음악에 빠진 박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천으로 향했고 줄곧 성인주점에서 밴드부로 일했다.
“나이트클럽이니 성인주점이니 서울이나 경기도에 안 가본 곳이 없죠. 수백, 수천 군데는 될 거예요. 사실 주점 밴드들은 소속감이라는 게 없어요. 프리랜서나 마찬가지죠. 또 주점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잦고 운영이 불규칙적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옮겨 다녀야 했어요.”
직장이 안정되지 않다 보니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악기를 짊어지고 무대를 찾아다녀야 했다. 인천에서 시작한 밴드 생활은 수원, 부천, 성남 등 경기도로 뻗어나갔고 결혼을 한 뒤로는 주로 서울 강남에서 활동했다.
“밤 업소 밴드들이 가장 어려운 게 그거예요. 수입이 일정치 않고 직장이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르는 불안이요. 그나마 밴드는 월급제가 많지만 밴드마스터는 팁 개념이 커요. 노래 한 곡당 얼마씩 받는 셈이죠.”

낮에는 회사, 밤에는 업소
혼자 살 적에는 음악이 좋다는 이유로 해결되었던 생계 문제가 결혼 후에는 달라졌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삼남매가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이 된 박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에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음악을 접을 수는 없었다. 낮에는 시설관리 일을 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성인주점에서 밴드마스터로 일했다.
“보통 새벽 1시면 일이 끝나는데, 어떤 날에는 손님들이 원해서 새벽 3, 4시까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 날에는 눈도 못 붙이고 낮일을 나가야 했죠. 그래도 아이들 키우는 재미, 음악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일 했어요.”
낮과 밤이 바뀐 생활로 몸도 힘들었지만 취객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보니 마음이 다치는 일도 많았다.
“젊었을 때는 손님들이랑 싸우기도 했어요. 술 취했으니 괜히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근데 세월이 흐르면서 대처방법도 생겼죠. 웃어넘길 줄도 알게 되고, 나름대로 상황을 봐서 피해야 할 때도 알게 되고요.”
주점에서 일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음악을 한다는 자부심을 이기진 못했다고.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음악 
박 씨는 30년간 밤 생활을 접고 6년 전 고향에 내려왔다. 타지에 살면서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내려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언젠가는 꼭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귀향을 결심했다. 고향에 내려온 박 씨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물론 음악도 접지 않았다. 틈틈이 동호회 활동도 하고 송악 이주단지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밴드마스터 생활을 하고 있다.
“예전처럼 전업으로 활동하진 않지만 죽을 때까지 음악은 계속할 거예요. 농사지으며 가족들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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